이란 아자디 징크스는 못 깼지만, 순풍에 돛 단 벤투호
아시아 압도하는 창과 방패, 손흥민과 김민재의 공수 활약 돋보여
(시사저널=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아시아의 맹주로 불리는 한국 축구가 A대표팀 간 전적에서 밀리는 나라가 딱 둘 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다. 사우디는 1경기 차의 사실상 백중세인 반면, 이란에는 무려 4패나 뒤져 있다. 특히 이란의 홈구장인 테헤란의 아자디스타디움에서는 우리 국가대표팀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극심한 징크스에 시달렸다.
그런 이란과 이번 2022 카타르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격돌하는 것이 확정되자 당초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무려 4회 연속이다. 가뜩이나 한국이 속한 최종예선 A조의 나머지 5개 팀이 모두 중동 국가인 상황에서 천적까지 만났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난 2011년 아시안컵 8강전에서 윤빛가람의 결승골로 승리한 이후 지금껏 이란과의 A매치 6경기에서 2무4패, 득점은 단 1골에 그치고 있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해발 1200m 고원에 위치해 원정팀의 체력 소모가 심하다.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에 기반한 폐쇄적 사회 분위기 탓에 경기를 준비하는 환경도 늘 뒤숭숭했다. 예정된 훈련장을 당일에 갑자기 바꾼다고 통보하는 텃세는 예사였다. 거기다 7만5000여 관중이 오직 남성으로만 가득 찬 아자디스타디움의 분위기는 브라질·독일조차 정상적인 경기를 하기 힘든 '원정팀의 무덤'이었다.
10월12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 아자디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4차전 이란과의 경기에서 손흥민과 김민재(오른쪽)가 분전을 펼치고 있다.ⓒ연합뉴스
무기력했던 9월의 벤투호, 10월 들어 달라진 모습
하지만 10월12일 열린 이란과의 월드컵 최종예선 4차전 상황은 달랐다. 코로나19 여파로 이란축구협회가 무관중 경기를 결정하며 광적인 이란 홈 관중을 피한 벤투호는 전반전을 지배했다. 점유율을 높게 가져가는 동시에 시리아와의 3차전에서 개선된 공격 전술이 효과를 봤다. 중원의 엔진으로 자리 잡은 황인범이 활발한 움직임과 날카로운 패스로 공격을 이끌었다. 김민재의 강력한 수비에 막혔던 이란 공격진은 전반 막판에야 세 차례 연속 위협적인 슛을 날리며 반격했다.
후반 3분 손흥민의 멋진 선제골이 터졌다. 1977년 이영무(2골), 2009년 박지성에 이어 아자디에서 골을 기록한 세 번째 한국 선수가 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 A조 1위를 내줄 위기에 몰린 이란은 후반 20분쯤부터 적극적인 압박을 통한 파상 공세를 가했다. 김민재가 결정적인 순간 중요한 수비를 하며 버텼지만, 결국 후반 31분 자한바흐시에게 헤딩 동점골을 내주고 말았다. 통산 첫 이란 원정 승리를 아쉽게 놓치는 순간이었다.
새 역사를 쓰는 데는 실패했지만 실리는 확실히 챙겼다. 3차전까지 전승, 최근 A매치 10연승을 기록 중이던 이란의 질주를 멈춰 세웠다. 이란의 최종예선 첫 실점도 한국이 만들었다. 이란은 3승1무(10점), 한국은 2승2무(8점)로 나란히 A조 1, 2위를 기록 중이다. 예상과 달리 양강 구도가 펼쳐지는 중이다. 이란과 한국 외에는 레바논(1승2무1패)만 승리를 챙겼을 뿐 UAE·이라크(이상 3무1패), 시리아(1무3패)는 아직 승리가 없다. 중동 팀들끼리 물고 물린 형국 탓이다.
지난 9월 이라크와 레바논을 상대로 홈 2연전에서 1승1무, 1득점에 그쳤던 벤투호는 10월 들어 달라진 경기력을 보였다. 지배력을 더욱 키우면서 득점 찬스를 늘렸다. 시리아와의 홈경기에서는 2대1로 힘겹게 승리했지만 황의조·황희찬이 전반에 맞은 무수한 기회를 살렸다면 대량 득점도 가능했던 내용이었다. 이란 원정에서도 전체적인 경기 흐름에서 우위를 보이며 의미 있는 승점을 챙겼다. 최전방의 손흥민이 2경기 연속 득점에 성공하며 해결사 본능이 살아났고, 후방에서는 김민재가 아시아 정상급 공격수를 꽁꽁 묶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김민재의 수비력에는 기복이 없었다. 지난 9월에도 이라크와 레바논 공격진을 침묵에 빠트리며 실질적인 MVP로 평가받았던 김민재는 소속팀인 터키의 페네르바체에서 주전으로 자리매김한 자신감을 앞세워 한층 더 괴물 같은 수비력을 발휘했다. 특히 이란이 자랑하는 투톱 아즈문과 타레미를 압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제니트 소속의 아즈문은 지난 시즌 러시아 프리미어리그 MVP다. FC포르투 소속의 타레미는 포르투갈 프리메이라리가 공격 포인트 1위를 달성한 선수다. 손흥민 다음가는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들이지만 지상 경합과 공중 경합에서 성공률 100%를 기록한 김민재 앞에서는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벤투호의 황태자로 불리는 황인범도 빛났다. 시리아전에서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선제골을 뽑아낸 그는 이란전에서도 공간을 절묘하게 이용하는 날카로운 패스로 공격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루빈 카잔으로 이적한 후 더욱 공격적으로 변신한 모습이 10월 시리아·이란과의 경기에서 돋보였다.
11월 UAE·이라크에 승리 거두면 본선행 9부 능선 넘어
전술적인 변화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벤투 감독은 손흥민을 측면이 아닌 중앙의 처진 공격수로 세우며 9월의 답답했던 흐름을 바꿨다. 손흥민은 시리아전에서만 총 8개의 슛을 기록했다. 최근 슛에 소극적이던 모습에서 탈피한 손흥민은 결국 이란전까지 2경기 연속 골로 살아났다. 페널티박스 안에 공격 숫자를 3명 이상 확보하며 찬스도 더 늘어났다. 소속팀에서 좋은 득점력을 보이던 황의조와 황희찬이 정반대의 결정력을 보여 아쉬움을 남겼지만, 점유를 통한 지배에 비해 실속이 없다던 9월까지의 평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나왔다.
경기력에서 안정감을 얻은 것과 별도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흐름 변화는 개선이 필요했다. 이란전에서 선제골 이후 이재성의 기동력이 떨어지고, 황의조와 황희찬이 상대를 위협하지 못하며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벤투 감독은 큰 변화를 주지 않았고, 후반 31분 결국 상대 역습에 동점골을 허용했다. 그 뒤에 이동경과 나상호가 교체 투입됐지만 경기를 뒤집진 못했다. 벤투 감독이 최종예선에서 상대 분석에 따른 큰 틀의 전략과 계획은 잘 그리지만, 경기 중 임기응변은 아쉽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상대보다 한 수 앞서 경기 향방을 바꾸는 적극적 교체 전술이 보완된다면 남은 최종예선은 순조롭게 나갈 수 있을 전망이다.
한국은 11월에 UAE(홈)와 이라크(원정)를 상대한다. 이라크와는 코로나19와 불안한 자국 정세로 인해 중립경기가 치러질 가능성도 있다. 양팀 모두 이란과 한국을 위협할 유력 후보였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으로 3위 경쟁에서도 밀려난 상태다. UAE는 4차전 후 판마르 베이크 감독 경질론까지 불거졌다. 이 두 경기를 잡으면 한국은 6경기에서 승점 14점을 획득한다. 지난 2018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총 10경기에서 15점을 따며 조 2위로 간신히 본선행에 성공했다. 승점 20점 획득 시 최종예선 통과가 확실한 상황에서 3위권과의 격차를 최대한 벌리면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 가능성은 한층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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