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뭘까. 수학여행의 성지였던 시절부터 불국사와 석굴암, 첨성대에는 사람들이 몰렸다. 지금은 동궁과 월지, 월정교 등의 밤 풍경이 더해졌다. 카페와 음식점이 몰린 황리단길 등 사계절 내내 북적이는 곳도 늘었다. 본격적인 겨울을 앞둔 경주를 찾았다.
◆경주의 낮과 밤
지난해 1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보 342점 가운데 9.9%인 34점이 경주에 있다. 국보를 포함해 보물과 사적, 무형문화재 등 국가지정 문화재는 우리나라 전체의 4.7%를 경주가 품고 있다.
사실 경주의 모든 유적은 낮의 것이었다. 야간 투어가 하나둘 늘더니 이젠 밤 풍경에 취하는 여행객이 더 많은 것 같다.
경주 낮 여행에선 불국사와 석굴암을 빼놓을 순 없다. 토함산에 자리 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재상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했다. 조선 선조 26년(1593) 왜의 침입으로 건물 대부분이 불타고 극락전·자하문 등 일부만 명맥을 이어오다 1969∼1973년 발굴조사 뒤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유산에 등재된 불국사 경내에는 다보탑과 석가탑 등이 있다. 두 탑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로 대웅전 앞은 늘 붐빈다. 10원짜리 동전 뒷면에 새겨진 게 다보탑이다.
석가탑, 다보탑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 등의 내용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두 탑 모두 불국사 건립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석가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통적인 신라 석탑이다. 1966년 도굴범에 의해 훼손된 석탑을 복원하다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이 발견됐다. 다보탑은 3층 석탑인 석가탑과 달리 목조건축의 요소들을 두루 갖춘 독창적인 탑으로 평가받는다. 기단 위의 돌사자는 원래 4마리였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지금은 1마리만 남았다. 1966년부터 발행된 10원짜리 동전에는 1982년까지 돌사자가 없는 다보탑이 새겨졌고, 이후부터 돌사자 한 마리가 포함됐다. 두 탑 중 석가탑(10.75m)이 다보탑(10.29m)보다 조금 높다.
석굴암은 입구에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360여개의 넓적한 돌이 주실의 천장을 구축했다. 온전한 내부 구경은 1975년 끝났다. 이듬해부터 항온·항습을 위해 유리벽이 생겼다.
경주시 홈페이지에는 첨성대가 가운데에 터잡았다. 낮과 밤을 관통하는 여행지라서일까. 낮에 인파를 모은 첨성대는 야간에 갖가지 조명을 입는다. 첨성대는 동양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다.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잘 다듬은 돌들이 받침대 위에 27단으로 원통을 그리며 쌓아 올려졌다. 첨성대를 만든 365개 안팎의 돌은 1년을, 27단은 27대 선덕여왕을, 꼭대기 정자석까지 합친 단수는 음력 한 달의 날수를 나타낸다고 한다. ‘사람이 가운데로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있다. 첨성대를 멀리서 보면 정자형 우물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어 의례 상징물이나 기념비적 건축물이라는 견해도 있다.
경주의 밤 여행은 월정교, 동궁과 월지로 이어진다. 월정교는 무료 관람이고, 동궁과 월지도 보수 기간인 내년 3월 말까지 무료다.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경덕왕 19년 “궁궐 남쪽 문천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을 통해 월정교가 알려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유실된 것을 10여 년간의 조사·고증으로 2018년 4월 복원했다. 교량이 먼저 복원됐고, 다리 양쪽의 문루는 나중에 지어졌다. 문루 2층에 교량 복원과정 등을 담은 전시관이 있다. 월정교 곳곳에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는 그림자가 가득하다.
동궁과 월지는 2011년 7월 이전까지 ‘임해전지(臨海殿池)’나 ‘안압지(雁鴨池)’로 불렸다. 동궁(東宮)은 신라 왕자들이 기거하던 별궁이고, 동궁 내 임해전은 연회나 회의를 하거나 귀빈을 접대한 곳이다. 조선시대 이후 폐허가 되자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雁)와 오리(鴨)만 날아든다’고 해서 안압지가 됐다. 1980년대 ‘월지(月池)’라고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면서 이름을 찾았다. 지금은 동궁과 월지로 부르지만, 674년(문무왕 14)에 월지가 먼저 조성됐고, 삼국통일 이후인 679년 동궁이 지어졌다고 한다. 월지와 동궁이라고 부를지도 고민했을까.
월지는 동서로 200m, 남북 180m인데, 남서쪽은 직선이고 북동쪽은 곡선이다. 어디에서도 못의 전체를 보기 힘들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와 같은 느낌이 든다’는 설명이 붙은 이유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각’(임해전)으로 불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까.
경주에는 지금도 새 카페와 식당, 여행지가 즐비하다. 지난달 중순 보문에 개장한 경주루지월드는 하루 최대 2200명이 찾는다. 리프트를 타고 350m를 가면 보문호수 등이 한눈에 펼쳐지는 정상에 닿는다. 루지를 타고 화랑(1.6㎞)과 천마(1.4㎞) 코스 중 하나로 내려온다. 천마코스가 더 스릴 있다. 엄인식 루지월드 이사는 “추워지면 손님이 줄 것 같아 걱정했는데 하루 1000명 이상은 온다”며 “한번 경험하면 적어도 두 번 이상은 타는 것 같다”고 했다.
루지월드와 가까운 ‘정글의 법칙’은 몰입형 비디오아트 전시관으로 지난 9월 문을 열었다. 비행기에 불이 나 정글에 불시착하는 설정으로 시작해 정글을 표현한 ‘재규어의 숲’, 버려진 ‘신전’, 바닷속에서 거대 거북 등을 만나는 ‘심해’ 등이 이어진다. 박경모 팀장은 “여러 의상을 체험할 수 있는 ‘렛미체인지 스튜디오’에는 30가지 인생사진 스폿이 준비돼 있다”고 소개했다.
송화산 자락의 화랑마을에는 한옥형 숙박시설(10동)인 ‘육부촌’과 캠핑장(42면)인 ‘호국야영장’, 20인 이상 단체를 대상으로 한 ‘신라관’ 등 숙박시설은 물론 산책로 등을 두루 갖췄다. 경주에 마땅한 수학여행 관련 시설이 없다는 지적에 지난 2018년 10월 문을 열었다. 박성환 주무관은 “육부촌은 지금도 주말에 방을 구하기 어렵다”고 했고, 내년 단체 수련활동 예약이 밀려들고 있다.
◆경주 감포 해녀의 꿈
경주의 익숙한 여행지를 뒤로하고 감포 해녀를 만나러 연동마을로 향했다. 이정숙(51)씨는 이 마을의 막내 해녀다. 아니, 경주 17개 어촌계 해녀들 중 가장 어리다. 이씨가 사업 실패로 방황할 때 선배 해녀인 어머니 김순자(72)씨 권유로 시작한 물질은 20여 년이 됐다. “한때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떳떳하게 산다”는 이씨는 두 달쯤 전 딸 정지윤(30)씨와 함께 감포 해녀들의 이야기가 담긴 ‘연동사랑방’을 열었다. “동네에 해녀가 많은데 쉴 곳이 없고, ‘경주에 해녀가 어디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홍보하고 싶었어요.”
동네 분이 터를 내어줘 공사를 시작한 게 지난 6월. 내부 공사와 사진 찍기 좋은 담장의 예쁜 구성품 등에 사재를 털었다. 아이들을 위해 전복, 소라에 색칠하는 체험도 한다. 얼마 전 사랑방에서 해녀증 갱신을 위해 사진을 찍었다. 이씨는 “물질할 때 모이는 13명 외에 4명이 더 있어서 놀랐다”고 했다. 우승헌 연동 어촌계장은 “경주 다른 동네에도 해녀가 있지만 연동이 가장 활성화됐다”며 “바다가 좋아 제주에서 여기로 오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경주의 막내 해녀 이씨의 바람은 하나다.
해녀들이 채집한 수산물 판로를 개척해 수익을 늘리는 것. 통상 상인을 통해 판매되면 해녀에겐 수익의 절반 이하가 돌아간다. 다른 해녀들은 나이가 있어서 이런 일에는 어린 이씨가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인터넷 판매와 상품 디자인을 도맡은 딸 지윤씨는 지금도 창원 집에서 2시간 거리인 감포를 밤낮없이 드나든다. 감포가 잘되면 다른 지역으로 점차 확대할 생각이다. 연로한 해녀들의 미래를 밝히는 등대인 셈이다. 이씨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오는 14일 도지사 표창을 받는다.
이씨와 딸 지윤씨가 연동 해녀들을 위해 운영하는 인터넷판 매 사이트 ‘해녀이정숙’에는 남은 상품이 별로 없다. 품질이 좋은 ‘큰 미역’ 등은 바로 완판된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우 어촌계장의 조업 방송에 연동 해녀들은 오늘도 물질 나갈 채비를 하고 있을 터다.
경주=글·사진 정재영 기자 sisley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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