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겨울에 가장 푸르른 대나무
조선 묵죽화 전형 세운 이정
5만원권 지폐 뒷면 '풍죽도' 그린 주인공
36세때 이미 만성.. 선조에 그림 선보일 정도
줄기·잎 비례 적절.. 대나무 특성 표현 발군
두가지 소재 하나의 화면에 등장시키기도
조선 후기 묵죽화 대가 유덕장
진경산수화·풍속화 유행 속 묵죽화 집중
가전화풍 영향 받으면서 이정 화풍 계승
통죽 소재 삼으며 다수 대나무 한 화면에
달·암석 등 등장시켜 특유의 정취 자아내
유덕장 ‘대나무’(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지금 가장 푸르른 대나무
대나무는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에 가장 푸르른 사군자다. 실제로는 다른 계절에 비해 색이 바랬겠지만 한결같음이 그리 보이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대나무를 소재로 삼아 수묵으로 그린 묵죽화는 고려 시대부터 널리 퍼졌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을 통한 문화 교류로 사대부화의 전통이 생기기 시작한 영향이다. 현존하는 고려 때 작품은 없지만, 김부식, 이인로, 정홍진 등이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북송 문인화를 따라 뛰어난 인품을 대나무의 특성에 비유해 그리고는 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 묵죽화는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경국대전’에서 화원을 뽑는 시험의 기준에 관해 서술해 놓은 부분에서 드러난다. 대나무 그림은 가장 높은 등급을 부여했던 화제(畵題)로 쓰여 있다. 점수로만 치면 당대에는 산수화나 인물화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던 셈이다. 사대부 화가와 직업 화가 모두 대나무를 그리는 데 열의를 쏟은 이유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조선 시대 묵죽 3대 화가로 불리며 탁월한 재능을 칭송받은 이들이 있었다. 이정, 유덕장, 그리고 신위로 이들은 기존 묵죽의 전통에 새로운 예술적 견해를 더해 발전시켰다.
이정이 땅을 뚫고 서있는 통죽을 그린 작품. 여섯 또는 여덟 폭 중 하나로 아래 설죽 장면과 같이 선보였다. 이정 ‘대나무’(조선 중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정, 눈 쌓인 날의 대나무
이정(李霆, 1554~1626)은 조선 중기에 묵죽화로 가장 뛰어났던 인물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이다. 명나라의 묵죽화풍을 소화한 뒤 조선의 미감을 반영, 조선 묵죽화의 전형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우리 일상에 들어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오만원권 지폐 뒷면에 그의 ‘풍죽도(風竹圖)’가 인쇄되어 있다. 바람에 활처럼 휘면서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의 탄성과 절개가 눈에 보이는 작품이다.
이정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증손이었지만 초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왕실 종친 대부분이 그러하듯 한양이나 경기 인근에서 태어나 성장했다고 추측하는 정도다. 증조부 임영대군이 왕위 찬탈에 협조한 공로를 인정받았고 부유하게 지냈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집의 전장(田庄)이 있던 충남 공주로 내려가 만년까지 지낸 기록은 상대적으로 많다. 경지에 오른 이 시기를 최립을 비롯한 한호, 차천로 등 주요 문인들이 글로 조명했다.
이정은 시·서·화에 모두 재능을 보인 삼절(三絶)이었는데 그중 묵죽화에 남달랐다. 36세에는 이미 만성하여 당시 왕인 선조에게 그림을 선보일 정도였다. 선조는 그가 하나의 족자를 완성할 때마다 물품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40세 무렵에는 임진왜란 중 왜구의 칼에 맞아 오른팔을 다치는 매우 큰 불운을 겪었다. 고난의 시간을 거쳐 회복해낸 뒤에는 그림에 더 열정을 쏟아 매진했다. 공주에서 20점의 대나무, 매화, 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어 완성한 시화첩(詩畵帖) ‘삼청첩’은 그 증거다.
이정의 묵죽이 뛰어난 품격과 함께 주목받은 이유는 그가 전과 다른 묵죽을 그렸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묵죽화는 세죽의 특징을 가지고 가는 줄기에 비해 넓은 잎을 그렸다. 그는 이와 달리 통죽을 그리거나 줄기와 잎의 비례를 적절히 구성해 대나무의 강인한 특성을 잘 담았다. 이 과정에서 통죽의 마디 등을 양쪽 끝이 두툼한 호형선(弧形線) 등으로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그의 묵죽화는 두 가지 소재를 하나의 화면에 등장시키며 그것의 특징을 드러내는 화면을 구성하기도 했다. 짙은 먹인 농묵으로 가까운 대나무, 엷은 먹인 담묵으로 먼 곳의 대나무를 그려 공간감을 살렸다.
‘대나무’(1625년)는 이정 묵죽도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본래 6폭 또는 8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나 현재는 다섯 폭이 전해진다. 1625년 72세인 노년의 나이에 그린 작품으로 만년의 노련한 필치를 느낄 수 있다. 다섯 폭의 대나무 그림은 각기 다른 배경에 다른 대나무를 위치 시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중 다섯 번째 폭은 설죽(雪竹), 즉 눈이 소복이 쌓인 대나무의 모습을 그려내어 눈을 잡는다. 농담의 변화로 겹겹이 그려낸 대나무 잎의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연륜을 경험할 수 있다. 눈 쌓인 부분은 먹을 칠하지 않고 비워 두었으며 옅은 담묵으로 바탕을 칠해 하얗게 드러낸 점이 인상 깊다. 소복하게 쌓인 눈의 흰 백색이 빛나며 배경의 칠이 눈 온 날 특유의 분위기를 전한다.
이정 ‘대나무’(조선 중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유덕장, 대나무가 있는 풍경
유덕장(柳德章, 1675~1756)은 조선 후기에 신위와 함께 묵죽화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자고(子固), 성유(聖攸), 호는 수운(峀雲), 가산(?山)이다. 그는 공조판서를 지낸 유진동의 6대손인데 유진동부터 집안은 대대로 묵죽화를 잘 그렸다. 유덕장이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등이 유행하며 시선을 끄는 가운데 묵죽화에만 집중한 배경을 알 수 있다. 그에게 대나무를 그리는 일은 가풍 속에 몸과 마음에 새겨진 하나의 태도였을 것이다.
유덕장의 집안은 5세 되던 해 경신환국에 의해 쇠락하며 어려움을 맞았다. 전과 다르게 장형만이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까지 올랐고 다른 형제들은 진사에 머물렀다. 유덕장은 진사에도 오르지 못하고 시절을 보냈으나 묵죽화로 훗날 이름을 알렸다. 덕분에 여든 넘게 장수하며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종2품인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이익을 비롯하여 이용휴, 권만, 이헌경, 신광수 등이 그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글을 남겼다.
유덕장은 묵죽을 그리는 데 가전화풍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정의 화풍을 계승하였다. 통죽을 소재로 삼으며 다수의 대나무를 한 화면에 배치해 농묵과 담묵으로 공간감을 드러냈다. 다만 그의 초기 작업은 이정에 비해 대나무의 입체감이나 화면의 생동감이 떨어지는 평가를 받았다. 마디를 직선에 가깝게 처리하거나 대나무를 나열한 방식 등에서 화풍이 경직되었다 읽힌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김정희는 유덕장의 묵죽이 당대에서 “현격히 뛰어나다”고 쓰면서도 다음 같이 말했다. “다만 그 포치(布置)가 8폭에 막히어 판각(板刻)의 형세가 약간 보인다.”
유덕장은 시간이 지나며 경직되었다 읽혔던 부분을 자기만의 화풍으로 승화해냈다. 뾰족한 대나무 잎과 직선에 가까운 마디를 대나무의 강인함을 드러내는 데 사용했다. 더불어, 대나무 자체의 상징성을 극대화하던 조선 중기 묵죽과 달리 다채로운 구성으로 서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대나무 외에도 안개나 달, 암석 등 주변 경물을 등장시켜 풍경이 자아내는 정취를 만들어낸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한 1750년의 ‘연월죽도(煙月竹圖)’는 이러한 대표적인 예다. 앞에 진하고 선명하게 그려진 대나무 뒤로 옅게 그려진 대나무 사이에는 마치 숲이 자리 잡은 것 같다. 둘 사이를 흐려 놓은 안개 위로 달이 떠올라 낭만적인 달 풍경을 경험하게 한다.
‘대나무’(연도 미상)는 유덕장 후년의 무르익은 기량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세로 길이가 180㎝에 다다르는 이 대형 작품은 크기에서도 자신감을 전한다. 그의 초기 작품은 50~70㎝ 정도의 화폭에 자주 그려졌지만, 말년의 작업은 1m가 넘는 대폭을 사용한 것이 많다. 여전히 대나무 마디는 곡선보다 직선에 가까우며 대나무 잎도 날카로운 모습이다. 그런데도 성숙한 붓의 움직임이 남긴 농묵의 표현은 마디 사이 입체감을 드러낸다. 얇은 대나무 잎의 잘 정리된 구성은 견고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노죽(老竹)의 쪼개진 윗부분을 과감하게 쭉 뽑아낸 것에서 대담한 필치의 구사가 보인다.
김한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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