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쳉: 세계건설' & '아트스펙트럼 2022' 전
'AI 예술가' 이안 쳉, 亞 첫 개인전 열고
인간의식 파고든 AI로 가상세계 펼쳐내
국내 젊은작가 8인, 도전적 실험전으로
설치·회화·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시도도
"인간·기계·과학이 공존하는 사회 전망"
삼성미술관 리움의 기획전 ‘이안 쳉: 세계건설’에 나온 영상 5점 중 ‘사절, 신들의 품 안에 거하다’(2015)의 한 장면. AI와 게임엔진으로 가상 생태계를 만들고 ‘인간의식’을 탐구한 작가의 장구한 스토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낯설 수 있다. 지난 행보를 지켜봤다면 말이다. 전시장 구석구석까지 채워 넣은 디테일, 그 바탕에 올린 묵직하고 장중한, 한마디로 ‘기죽이는’ 전시작들이 무기였으니까. 그런데 달라졌다. 거추장스러운 분위기를 거둬내고 날 듯이 가벼워졌다고 할까. 슬쩍 흉내만 낸 것도 아니다. 작정한 듯 보인다. 담벼락 밖 트렌드를 따라잡자고 했든, 내실을 다진 새로운 지향을 만들자고 했든.
삼성미술관 리움이 올해 첫 전시로 올린 기획전 얘기다. 한쪽에선 AI가 주역인 미래 가상세계를 펼쳐 놓고, 다른 한쪽에선 역사·제도·기술·편견·국적 등이 엉킨 현실의 제약을 극복해 보자는 시도를 모아뒀다. 그 한쪽에선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폭발시킨 애니메이션 영상을 계속 돌리고, 다른 한쪽에선 6m 높이의 벽화 같은 회화를 배경으로 제대로 단단히 짠 목재 체력단련장을 통째 들이기도 했다. 이 모두는 30대 초반부터 40대 초반에 걸친 젊은 작가들의 손과 기량, 실험정신이 빚어낸 것이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이 지난 2일 기획전 둘을 동시에 개막했다. 미국 LA에서 나고 뉴욕서 활동 중인 이안 쳉(38)이 제작한 영상 5점으로 꾸린 ‘이안 쳉: 세계건설’ 전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국내 작가 8명(김동희, 김정모, 노혜리, 박성준, 소목장세미, 안유리, 전현선, 차재민)이 회화·설치·영상·퍼포먼스 등 장르를 넘나든 17점을 내놓은 ‘아트스펙트럼 2022’ 전이다.
‘아트스펙트럼 2022’ 전에 참여한 8인의 작가 중 소목장세미가 제작한 ‘체력단련활동장’(2021∼2022). 뒤로 전현선의 회화 ‘두 개의 기둥과 모서리들’(2021)이 보인다. 리움미술관이 ‘젊은 작가 발굴·지원 프로젝트’로 20여년 전부터 진행해온 기획전이기도 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갑자기 튀어나온 ‘뜬금없는 복병’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재개관전에 이미 심어뒀던 그 한 가지는 놓치지 않고 쥐었다. ‘인간’이다. 굳이 붓으로 사람을 그리고 칼로 사람을 조각하지 않더라도 결국 사람이 이어갈 세상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큰 그림이 깔렸다.
인간의식 찾아가는 AI로 ‘작가만의 세계’ 쌓아
고대 인류의 공동체. 이들에겐 ‘의식이 없다’. 주술사가 들려주는 조상의 목소리가 판단과 목표의 전부일 뿐. 그러던 어느 날 주술사의 딸이 화산서 날아온 파편에 머리를 맞는 사고로 더 이상 조상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니 어쩌랴. 생각이란 걸 해야 할 수밖에. 이 아이는 ‘의식을 가진’ 최초의 인간이 된다(이안 쳉 ‘사절, 신들의 품 안에 거하다’).
쳉이 거대하게 키운 ‘세계건설’은 두 개의 키워드로 하나의 주제어에 접근해 간다. ‘사절’과 ‘밥’(BOB)이란 열쇳말로 ‘인간의식’이란 테마를 꿰어내는 건데. 말처럼 복잡할 건 없다. ‘사절’ 연작 3편과 ‘밥’ 연작 2편이 ‘인간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로 흘러가는가’를 펼쳐내는 거다.
‘이안 쳉: 세계건설’ 전에 나온 영상 5점 중 ‘사절, 완벽을 향해 분기하다’(2015∼2016)의 한 장면. 인간이 사라지고 시바견만 남은 세상에 AI가 인류의 마지막 모습을 찾는 여정을 다뤘다. ‘사절’ 연작 3점 중 두 번째 에피소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015∼2017년 제작한 ‘사절’ 연작은 ‘주술사의 딸’을 주인공으로 삼은 ‘사절, 신들의 품 안에 거하다’(2015)를 도입부로 삼는다. 이어 인간이 사라지고 시바견만 남은 세상에 AI가 인류의 마지막 모습을 찾는 여정을 다룬 ‘사절, 완벽을 향해 분기하다’(2015∼2016)가 두 번째 에피소드. 세 번째는 몸은 없지만 슈퍼지능을 가진 어머니AI가 결국 생명체까지 점유하는 ‘사절, 스스로 일몰시키다’(2017)다.
3편의 에피소드는 전시장 내 별도의 벽면을 차지하고 끊임없이 스토리를 토해낸다. ‘사절’ 연작의 특징은 ‘무한길이’다. 아무도 시작과 끝을 봤거나 볼 사람이 없다는 뜻인데. 마치 AI를 작품 안에 박아 진짜 살아 있는 듯 스토리를 개척해나가는 듯하달까. 개막에 맞춰 방한한 쳉은 이를 두고 “작품의 환경과 캐릭터는 만들어내지만 작품 속 전개는 모두 컨트롤하지 않았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작가 이안 쳉이 아시아 첫 개인전 ‘세계건설’을 연 리움미술관의 전시장 입구에 앉았다. AI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는 세상을 만들어두고 역설적으로 ‘인간의식’의 본질을 묻고 있는 작가는 “살아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고, 실제 생명체가 아닌 AI로 가상 생태계를 세웠다”고 말했다(사진=리움미술관).
이후 ‘밥’ 연작은 작가의 ‘인간의식’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풀어낸다. 역시 결말이 없는 ‘밥’(2018∼2019)과 48분으로 한정한 ‘밥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2021) 두 편이 상영을 이어가는데.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신념이 담긴 가방’(Bag of Beliefs)을 줄인 ‘밥’(BOB)이란 타이틀에 숨겨뒀다. 먼 미래에 진화한 AI가 ‘무엇이 도대체 인간이고 그 본질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수시로 꺼내놓고 담아내는 과정이니. 하지만 대단히 역설적이라고 할 수밖에. AI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인간의식’의 본질을 따져 묻고 있으니 말이다.
‘이안 쳉: 세계건설’ 전에 나온 영상 5점 중 ‘밥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2021)의 한 장면. AI와 인간이 공존하는 접점을 찾아내는 신작은 리움미술관이 제작지원해 완성한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48분짜리 영상으로,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해뒀다(사진=리움미술관).
미국 심리학자 에릭 번의 이론 ‘인생각본’(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인생각본을 수정할 수 있다는)에 영향을 받았단다. 쳉은 “사람은 누구나 부모에게 받는 각본을 취하고 버리며 성장한다는 점에서 내 이야기가 아주 새롭지 않다”며 “다만 AI를 끌어들인 건 인간의식이 너무 복잡한 구조여서 빼고 갈 순 없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게임엔진을 도구로 가상 생태계를 만드는 건 쳉의 장기기도 하다. 리움미술관 학예사들이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한 작가의 작품을 보고 일찌감치 점찍은 뒤 제작지원을 하면서까지 아시아 첫 개인전으로 연결시켰다는데. 결국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 세상에 인간의식을 들이대며 작가만의 ‘세계건설’을 일구는 데 힘을 보탠 셈이다.
리움미술관 ‘이안 쳉: 세계건설’ 전 전경. 이안 쳉의 영상 5점 중 ‘밥’(2018∼2019)을 한 관람객이 감상하고 있다. 작가는 뱀을 닮은 인공생명체 ‘밥’을 등장시켜 인간의식이 장동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구현하며 ‘도대체 무엇이 인간인가’란 질문에 답을 찾아간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젊은 작가 8인에게 내맡긴 ‘새로운 현대미술’
시간을 주고 예술을 산다. 마치 진짜 거래인 양 계약서를 쓰고 증명서도 발급하면서(김정모 ‘시간-예술거래소’ 2022). 전통 소목장 기술로 원형 트랙과 평균대, 그네를 만들어 매달고, 클라이밍벽까지 세워둔 놀이터이자 체육관, 서커스장(소목장세미 ‘체력단련활동장’ 2021∼2022). 여기에 작은 캔버스를 모아 붙여 장대한 벽으로 쌓고 공간을 만든 회화(전현선 ‘두 개의 기둥과 모서리들’ 2021)까지.
‘아트스펙트럼’ 작가들의 공통주제는 ‘불합리하고 답답하며 꽉 막힌’ 벽을 넘어 ‘도전하고 외치며 새로운 참여·경험’을 자극하는 데 있다. 사실 ‘아트스펙트럼’은 리움미술관이 진행해온 ‘젊은 작가 발굴·지원 프로젝트’의 다른 이름이다. 미술관이 개관하기 전인 호암갤러리 시절, 한국작가 서베이 전시(2001)로 시작한 이후 이번이 7회째다. 4년여간 운영을 멈췄던 미술관을 따라 함께 쉬어야 했던 그 기획전이 올해 다시 돌아온 셈이다. 미술관은 “올해는 내부 큐레이터 4인과 외부 큐레이터·평론가 4인이 추천해 8명의 작가를 선정했다”며, 전시가 한창 진행 중인 5월쯤 이 중 1인을 뽑아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상금 3000만원)을 수여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아트스펙트럼 2022’ 전에 참여한 8인의 작가 중 김정모가 설치한 ‘시간-예술거래소’(2022). 예술을 소유하고 거래하는 과정에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다만 여기선 돈 대신 시간을 지불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AI, 가상세계, 미래사회란 테마, 이게 아니더라도 ‘애니메이션 영상’만으로 꾸린 기획전은 예전 리움미술관에선 ‘없던 일’이다. 태현선 학예연구실장은 이렇게 가름했다. “애니메이션, 디지털 매체는 동시대에 중요한 화두가 아닌가. 인간과 더불어 기계와 과학이 공존하는 사회의 모습이 어떤가에 대한 전망도 우리의 숙제다.”
젊어지자 작정한 리움미술관의 행보는 이번 한 차례만이 아닌 듯하다. 7월 3일까지 여는 두 전시 이후 9∼11월에는 공간 제약을 넘어서 어디서나 접속·감상할 수 있게 한 ‘증강현실’(AR·가제) 전, 미래사회 문제에 대응하며 세상의 변화를 찾아나갈 아시아그룹전 ‘구름산책자’ 등을 줄지어 세웠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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