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찾아가다 1-9] 운민의 강화별곡
[운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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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족산성 남문 전등사 경내를 감싸고 있는 정족산성은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프랑스군과의 치열한 격전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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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발이 닿는 장소마다 역사의 향기가 봄꽃처럼 은은한 향기를 뽐내고 있다. 고인돌, 강화산성, 초지진, 보문사, 고려궁지 등 경주, 부여 못지않게 유적지의 밀집도가 높은 강화에서 오직 한 군데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상징성으로 마니산 참성단을 들 수 있겠지만 산 정상을 밟아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간직한 강화도에서 가장 많은 여행객들이 찾고 삼국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고장의 역사를 담고 있는 장소를 꼽자면 당연 전등사가 첫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전등사는 강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답게 삼랑성의 동문과 남문 두 군데서 진입할 수 있다. 나는 삼랑성에서 규모가 크고 전등사의 정문에 가까운 남문을 출발점으로 삼고, 주차장에 내려 조심스럽게 경내를 향해 걸어갔다. 생각보다 비탈길이라 걷는 길이 편하진 않지만 호젓한 숲길과 함께 흙을 밟으며 걸으니 금세 삼랑성의 남문이 눈에 들어왔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은 머지않은 곳에 자리한 마니산의 참성단과 함께 단군신화의 전설이 살아있는 장소다. 전등사를 중심으로 정족산 정상까지 이어져 있으며, 성벽을 한 바퀴 도는 트레킹 코스로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하지만 강화도가 근대에 들어와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은 만큼 이 장소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의 치열한 혈전이 있었다. 하지만 양현수 장군이 이끄는 군사의 매복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던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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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사 무설전 전등사 무설전은 현대식 법당으로 종교의 거룩한 느낌보다 마치 현대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 갤러리의 인상을 강하게 풍기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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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의 전체적인 자리 앉음새를 살펴보면 정족산성의 안쪽 너른 터에 자리한 만큼 단순한 불교 사찰 이상의 역할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오르막길을 차근차근 올라가며 역사의 상상력을 더해가 본다. 전등사는 불교가 전래된 시기인 소수림왕 11년(381년)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알려졌다.
한 마디로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故)의 사찰인 것이다. 원래 진종사라 불리던 전등사는 고려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인기 스님으로 하여금 중국의 대장경과 옥으로 만든 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傳燈), 즉 불법을 전하는 사찰이란 이름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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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설전 법당을 장식하는 그림들 무설전 법당 벽면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걸려있어 마치 갤러리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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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안에 자리한 입지를 살려 전등사는 고려시대에는 팔만대장경을 조성한 사찰 중 하나였고, 절 뒤편에 자리한 정족산 사고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도 했다.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 등지에 보관되던 실록은 격동의 역사 속에서 전등사에서 지켜낸 정족산사고본만이 유일하게 전책으로 남아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전등사에서 좀 더 안쪽에 위치한 정족산 사고는 실록을 보관하던 장사각과 선원세보를 비롯한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선원보각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한때 이곳이 프랑스와의 전쟁터가 되었을 때 전등사 스님들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서책들을 토굴로 옮기면서 그 책무를 다했다고 한다. 이 실록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생각해 본다면 전등사의 무게감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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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사 대웅전 전경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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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중요한 전등사의 이야기들을 되짚어가며 어느새 전등사의 경내로 진입했다. 다른 산사들도 아름답지만 특히 전등사는 경내의 조경이 아름답다. 절 마당에는 고목들이 거룩한 존재감으로 우뚝 서 있고, 화단에는 화사하게 핀 아름다운 봄꽃들이 절의 아름다움을 더 빛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전등사는 옛 건축뿐만 아니라 경내에 진입하기 직전의 공간에서 심상치 않은 내공의 현대건축도 존재한다. 옛 고찰들이 사세를 키워본다고 휘황찬란한 거대한 법당들을 새로 지어 사원의 고즈넉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드라마 세트장 같은 속이 텅 빈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전등사는 조금 다르다.
전등사 담벼락 안으로 쏙 들어간 무설전이 바로 그곳이다. 거대하게 짓는 다른 불전과 다르게 여기 무설전은 전등사 담벼락 안으로 건물을 파고 들어가 선뜻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존 사찰과는 다른 파격적인 구성에 신선한 자극을 받는다. 마치 현대작품을 전시한 갤러리처럼 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중앙에는 탱화와 불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 놓여 있었다.
미술관인지 법당인지 아리송한 궁금증만 남긴 채 드디어 전등사 경내로 들어왔다. 전등사의 중심 법당이면서,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장소인 대웅전이 당당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 중기에 지어졌고, 특히 건물이 고졸미가 있어 아름답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스폿은 대부분 한곳에 집중되어 있다.
대웅전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사람 모양의 나무 조각이다. 전설에 의하면 대웅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가 주모와 사랑에 빠지고 혼인할 생각으로 그녀에게 돈을 맡긴다. 그러나 주모는 돈을 받고 자취를 감쳤다고 한다. 도편수는 그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나부상을 조각해 현재도 대우전의 처마 네 군데에 남아있는 벌거벗은 나무상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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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을 떠받드는 나부상 대웅전의 처마의 기둥마다 지붕을 떠받드는 나부상이 조각되어 있다. 도편수의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지지만 야차상이라는 학계의 의견이 대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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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추녀를 지지하기 위한 야차상으로 다른 절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보이는 조각상이라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 전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에겐 대웅전 처마 밑 나무조각상을 볼 때마다 도편수의 마음에 대해 감정 이입하며 예술의 불멸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밖에도 전등사에는 범종, 약사전, 명부전 시왕상등 보물급 문화재가 많지만 대웅전의 나무 조각이 주는 이야기 때문에 좀처럼 벗어나질 못하는 것 같다. 많은 이야깃거리와 독특함이 살아있는 강화도 전등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