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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전 禪師들의 지혜로 힘든 우리네 삶 위로하고 싶었죠"

부동산 분양정석 2021. 11. 26. 11:13

이철수 판화가는 “우리 청년들이 ‘애고, 힘들어’하는 것을 생각하며 작품을 만들었더니 젊은이들이 와서 보고 ‘정말 내 마음 같다’며 웃더라”고 했다.

국제 구호·환경 활동을 하는 비영리법인 ‘세상과 함께’ 이사장인 유연 스님이 지인에게 이철수 작가의 ‘무문관’ 판화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판화가 이철수, 데뷔 40주년 기념 연작판화집 내고 전시회

선불교 공안집 ‘무문관’ 주제

48개 그림과 가르침 글 붙여

‘애고, Ego’ 작품으로 청춘 격려

‘호박옹’ 통해선 노년층 보듬어

“성찰통해 삶의 본질 보고싶어

다음엔 기독교 성서 다룰 것”

글·사진 = 장재선 선임기자

주변 사람들에게 사 주고 싶은 책을 모처럼 만났다. ‘문인가 하였더니, 다시 길’(문학동네)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철수(67) 판화가가 데뷔 40주년을 맞아 선불교 공안집(公案集) ‘무문관’을 주제로 만든 연작 판화를 담고 있다. ‘무문관’은 중국 남송 승려 혜개가 수행 지침으로 삼아야 할 공안에 해설과 송(頌)을 붙인 것이다. 판화 48개가 그 내용을 풍성하게 품고 있다. 800년 전의 가르침이 이 작가의 시선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다가와 세상과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지혜로 거듭난다.

“요즘 세상은 제정신으로 견디기 쉽지 않잖아요? 마음자리를 온전히 지키고 살기 힘들지요. 코로나도 있고, 경제적 문제도 있겠으나 그보다 더 멀리 내다보며 삶의 본질을 살펴보고 싶었어요.”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전시장에서 이 작가를 만났다. 이 작가는 이곳에서 오는 29일까지 판화 전시를 열고 있다. 책에 담은 판화를 포함해 60여 점을 선보인다. “대종경(大宗經) 연작전을 한 이후로 6년 만에 전시하는 거예요. 일반 작품은 10년 만이고요.”

그는 소년처럼 해맑게 웃으며 설명했으나 인터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관람객들이 계속 찾아와서 사진을 찍자고 해서였다. 그의 마니아 층이 두텁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작품들을 이렇게 전시해놓고 보니 사람들과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되돌아보게 되더군요.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무리한 주문이잖아요. 돈과 이익으로만 연결된 세상에서 전력 질주해도 안 된다며 불안하게들 여기실 거예요.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지만, 제가 그동안 공부하고 경험한 것들을 전하는 자리를 마련한 거지요.”

그는 판화가로 명성을 누리던 1990년대에 한 독일 여성 변호사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신의 판화에서 전체주의의 냄새가 난다!” 이후 그는 판화 작업을 중단하고 텃밭 농사에만 매달렸다. 농사를 통해 세상살이의 기쁨을 회복하고, 삶을 제대로 공부해보겠다는 발심(發心)을 하게 됐다. ‘무문관’ 공부는 그 마음의 흐름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책 뒤에 이렇게 썼다.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은 처지라 짧고 깊게 읽을 수 없어, 조사어록을 십 년 이상 곁에 두고 쉬엄쉬엄 읽었습니다. ……어려운 말씀도 오래 들으니 알 듯하고, 때로 노인네 잔소리처럼 못 들은 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대꾸도 하고 시시비비도 하면서 연작을 만들었습니다. 초고는 십 년쯤 전에 만들고 새기기는 2021년에 했습니다.”

그의 판화는 선사들의 다양한 일화를 새기고 스스로 공부한 내용을 전한다. 판화에 담긴 글들이 죽비처럼 내리꽂히며 세상의 비의(秘意)를 갈파한다. 그런데 그 내용은 언어와 문자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이니 아이러니하다. 무릇 세상의 진리는 이처럼 역설(逆說) 속에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근년에 불교 세계를 다뤄온 그는 “다음엔 기독교 성서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강원 횡성의 풍수원 성당엔 그가 만든 ‘십자가의 길’이 있으니 가톨릭도 그의 작품 세계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 ‘무문관’ 연작 이외의 작품들은 주로 자연에서 건져 올린 깨달음을 담고 있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연민도 스며 있다.

“여기 이 작품은 청년들을 생각하며 새긴 거예요.” 그가 ‘애고, Ego’라고 적혀 있는 작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애고, 애고! 신음 소리가 날 만큼 힘든데, 상처받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에고가 강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그는 인생의 가을에 서 있는 동년배들을 위해선 ‘호박옹’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다. 노랗고 거무스름한 빛이 나는 호박을 새겨놓고 그 밑에 이렇게 적었다. “멋지게 늙으셨습니다.”

그는 자신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작품 전시 일도 챙겨주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절실히 표현했다. “제 곁에서 보살처럼 있어 줍니다. 내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