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마운스토리'] 경기 가평 화악산
일교차 크고 물 많아 예쁜 단풍과 암벽·계곡 절경.. 김시습·김수증이 은둔하기도
명지산에서 바라본 화악산 정상에는 군부대(사진 중앙)가 있고, 오른쪽 응봉까지 군사도로가 연결돼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아래로는 아득히 깊어 땅이 없고, 위로는 텅 비어 하늘이 없도다. 눈은 흐려서 보는 것이 없고, 귀는 흐리멍덩하여 듣는 것이 없도다. 무위의 경지로 뛰어올라 지극히 맑아져서, 태초와 이웃이 되리.’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정치인이자 시인인 굴원(B.C 343?~B.C 278?년)의 초사楚辭(초나라 노래) 말미에 나오는 내용이다. 망국지세의 초나라를 걱정해 무위자연으로 지내는 시인이 그 마음을 그대로 글로 표현했다. 이를 조선 최대 사대부 가문의 자손인 김창협이 그의 문집 <농암집>에 백부 김수증을 기리면서 인용했다.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껴 자연에 파묻혀 사는 김수증이 세속적인 지각을 완전히 버리고 청정무위의 경지에 다다랐음을 빗대 읊은 것이다.
화악산華岳山(1,468.3m)은 그만큼 높고 깊다. 운악·관악·감악·송악과 함께 경기 5악에 속하는데 그중 가장 높다. 경기도에서 최고 높이를 자랑하며 남한에서는 12번째. 화악산이 현대 들어서 경기 5악 못지않게 의미 있는 내용은 정상 신선봉과 서쪽 중봉(1,450m)~동쪽 응봉(1,436m)의 삼형제봉이 한반도 정중앙에 있다는 점이다. 38선이 화악산 정상을 지나며, 국토자오선이 바로 화악산에서 교차한다. 그래서 풍수가들은 화악산을 태극의 가운데로 해석하며 명당으로 보기도 한다. 국토의 정중앙이자 가장 높은 화악산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6·25 때 매우 격렬한 전쟁을 치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역사를 전하듯 지금도 정상 신선봉은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어 접근이 안 된다. 인근 중봉까지 오를 수 있다. 중봉 정상 안내판에는 ‘화악산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한다. 현재 화악산 정상은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으므로 이를 대신하는 중봉이 한반도의 중심이란 뜻이다’라고 알리고 있다.
화악산 주변은 1,000m 이상 산들로 첩첩산중을 이뤄 산그리메를 보여 준다. 바로 이웃 봉우리가 석룡산(1,153m), 조금 남쪽으로 도립공원 명지산(1,267m)이 있고, 그 뒤로 강씨봉, 운악산 등도 같은 산군을 형성하며 넘실거린다. 산이 깊으면 골도 깊다. 골짜기마다 계곡을 만들어 수량이 매우 풍부하다. 많은 수량은 산 전체를 만산홍엽으로 물들인다. 특히 2021년 같이 가을비가 자주 내리고 큰 일교차를 나타내는 해는 단풍이 더욱 예쁜 빛깔을 낸다. 9월 하순부터 정상 부위에 뻘겋게 물든 단풍들이 뽐내고 있다.
석룡산과 화악산 계곡 사이로 흐르는 조무락鳥舞樂골도 워낙 유명하다. 산수가 빼어나 새들이 춤을 추며 재잘거리며 즐긴다고 해서 명명된 골짜기다. 조무락계곡에는 넓은 물줄기가 좁아지며 폭포수가 돌아 흐르는 골뱅이소와 중방소, 가래나무소 등 여러 소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복호등폭포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각각의 소마다 암석과 수목이 우거져 바위 틈새에서는 한여름에도 냉기를 느낄 만큼 찬바람이 분다. 조무락골에서 왼(서)쪽으로 가면 석룡산이고, 오른(동)쪽으로 오르면 화악산으로 향한다.
경기도에서 가장 높고 경기 5악 중 으뜸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변계량이 남긴 시문집 <춘정집>에 화악산을 답사하면서 사육신 길재 야은의 지조를 우러르며 기린 시가 전한다.
‘길후가 우뚝하게 혼자서 수립하니/ 화악산이 가을 하늘 드높이 솟았다네.// 고상한 그 절개 비유할 데 없으니/ 확산되는 그 명성을 그 누가 저지하랴// 천지와 더불어 고하를 다투고/ 일월보다 한층 더 찬란히 빛났다네.// 혼자서 우뚝 선 건 세한의 지조인데/ 어떻게 초목 따라 떨어질 수 있겠는가.’
우뚝 솟은 산세가 마치 영원히 빛날 지조로 비유하고 있다. 이와 같이 화악산은 주변 봉우리들을 압도하며 홀로 우뚝 솟아 있어, 예로부터 세상을 등지고 은둔생활을 했던 선비들이 즐겨 찾았다. 김시습과 김수증·김수흥이 은거했던 산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욕심과 이익을 좇는 세상을 등지고 깊고 깊은 곳을 찾아 자발적 은둔생활을 즐겼다는 점이다. 5세부터 천자문을 통달하고 신동·천재란 말을 들으며 성장한 ‘오세동자’ 김시습은 세조가 단종을 유배 보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수락산·설악산·청량산 등 전국의 산천을 떠돌며 승려로서 무위자연의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수증도 동생 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버리고 화악산 기슭에 있던 농수정사로 들어갔다. 지금의 화악산 응봉능선 북쪽 계곡으로 추정된다. 그는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칭하고 주희처럼 곡운구곡을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곡운은 그의 호. 곡운구곡은 지금도 남아 그들의 자취를 전한다. 괴산의 화양구곡과 함께 한반도에서 유이하게 ‘실경實景’으로 남아 있는 명소다. 어쨌든 화악산은 김시습과 김수증이 세상을 등졌던 깊고 깊은 ‘은둔의 산’이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한반도 정중앙의 산이면서 6.25 때 격전을 치른 ‘아픔의 산’인 것이다.
화악산은 사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지명을 그대로 간직하고 사용하는 몇 안 되는 명산이다. 통일신라가 전국의 명산대천을 대사·중사·소사 삼산오악으로 나눌 때 화악은 소사로 지정돼 국가행사를 지냈다. <삼국사기>권32 잡지 제사조에 금강산, 설악산, 감악산, 월출산, 덕유산 등과 함께 ‘화악花岳’으로 소사小祀로 지정됐다고 나온다. 설악·화악만 지금과 같은 지명이고 나머지 산은 지명이 전부 다르다.
다만 한자를 ‘華岳’과 ‘花岳’으로 혼용해서 표기했지만 의미는 같다. 소사는 한반도를 몇 개 핵심권역으로 나눠 대표적인 명산에서 국토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국가에서 직접 산신제를 주관해서 지내도록 한 행사였다. 화악산은 고대부터 한반도의 정중앙과 높은 고도 때문에 군사전략적 위치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왔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고려사지리지> 가평군조에 ‘본래 고구려의 근평군斤平郡(병평竝平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춘주에 내속시켰다. 화악산花嶽山이 있다. 또 청평산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화악산은 경기권이라기보다는 강원권에 가깝다. 고려 때에도 춘천 청평산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때 춘천권에 속하기도 했다.
화악산 정상 신선봉 가기 전 길게 펼쳐진 응봉 능선에 흰 구름이 뒤덮여 있다.
백운·백작·광악산이라 불렸다는 기록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려사지리지>에 소개된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부분이 있다.
‘화악은 (가평)현 북쪽에 있는데, 그 북쪽은 낭천狼川의 지경이 된다. 봄·가을에 소재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청평산은 현 동쪽에 있다. 땅은 메마르며, 산이 높고 일찍 추워진다. (후략)’
국가에서 지내던 제사를 지방 소재관으로 이관해 1년에 두 차례씩 지내게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가평현편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소개되지만 춘천도호부편에서는 ‘화악산은 부의 서쪽 90리에 있다. 영평 사람들은 백운산이라고 일컫는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춘천읍지>에서는 ‘영평사람들은 백작산白作山이라고 칭하였다’고 나온다. 백운산은 이전 백운산편에서 자세히 언급했지만 봉우리가 높아 항상 흰 구름이 걸쳐져 있다고 해서 명명했다고 전한다. 백작산은 흰 구름을 만드는 산이라는 의미로 백운산과 별로 달라 보이진 않는다.
화악산 중봉 비석.
김창협이 쓴 <농암집>24권 記편에 ‘부지암기不知庵記’란 제목으로 화악산의 형세와 관련한 설명과 그의 큰아버지 김수증과 김시습에 관해서 자세하게 소개한다.
‘화악산은 춘천의 서북쪽에 있다. 산의 북쪽 깊숙한 곳이 있으니, 바로 곡운谷雲으로 옛날 청한자淸寒子(김시습)가 살던 곳이다. 그곳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긴 산등성이로 막혀 있는 데다 긴 내와 큰 계곡이 얽혀 있어 사방 어느 쪽으로 들어가려 해도 평탄한 길이 없다. 그래서 그곳에 가는 사람들은 왕왕 원숭이처럼 벼랑을 타고 개미처럼 비탈에 붙어 만 길 높은 벼랑을 걸으며 까마득한 골짜기를 굽어보곤 하니, 그 험하기가 이와 같다. 이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산골 백성과 도망한 가호로, 마치 새와 짐승들처럼 모여 살고 있다.
청한자 이후로 수백 년이 지난 뒤에 우리 백부伯父(김수증)께서 비로소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처음에는 매월대의 서쪽, 와룡담 위에 정자를 지어 거처하고 최고운(최치원)의 시구를 따 농수정籠水亭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러고는 매일 그곳에서 배회하며 시를 읊었다. (중략)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이고 여러 겹의 물로 에워싸여 세속과 더욱 멀어졌다. 선생은 그 집을 부지암不知庵이라 명명했다. (후략)’
화악산과 석룡산 능선 사이에 있는 조무락골로 계곡이 흐르고 있다.
같은 책 산천편에는 화악산의 형세에 대해 더 자세하게 소개한다.
‘서쪽 기슭은 층층이 돌이 쌓인 가파른 바위인데 정상에 이르러 극치를 이룬다. 운무 때문에 낮에도 캄캄하여 사람들이 두려워 그 꼭대기에 선뜻 올라가지 못한다. 날씨가 가물면 군읍에서 사람들을 많이 보내 그 꼭대기를 밝게 하여 비를 얻는다.’
사람들이 원숭이처럼 벼랑을 타고 개미처럼 비탈에 붙어 만 길 높은 벼랑을 간다는 재미있는 표현도 곁들였다. 산신제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기우제까지 지낸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높고 험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정상엔 군부대 주둔 접근 못 해, 인근 중봉이 정상 대행
<동국여지지>에는 또 다른 내용이 나온다. ‘산천’편에 ‘화악산은 (가평)현 북쪽 30리에 있다. 속칭 광악산廣嶽山이라 한다. 허목의 유산록에 “화악은 가평과 춘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둘레가 300여 리이며, 가장 웅장하고 수려하다. 서쪽 골짜기는 층층이 돌이 쌓인 가파른 바위인데 정상에 이르러 극치를 이룬다. 구름과 안개 때문에 낮에도 캄캄하여 사람들이 감히 그 꼭대기에 선뜻 올라가지 못한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악산이란 별칭은 처음이다. 그렇다면 화악산은 백운산·백작산·광악산 등으로 불렸다는 얘기다. 전부 높고 험해서 구름 많은 암벽의 산이라는 의미를 암시한다. 지금의 화악산도 암벽이 꽃처럼 펼쳐진 산이라는 뜻이라고 전한다.
<다산시문집>에는 곡운구곡을 자세히 소개한다. 곡운구곡은 지금 응봉능선 북쪽 계곡을 말한다. 일부 지도에서는 응봉을 화악산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정확한 표기는 화악산 응봉이다. 다산이 곡운구곡을 소개한 이유는 그도 오랜 시간 귀양살이를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인근에 은둔생활을 했던 김수증을 떠올리며 깊은 감회에 빠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계곡 입구에서 상류로 올라가며 차례로 이름 붙였다. 1곡은 방화계傍花溪, 2곡은 청옥협靑玉峽, 3곡은 신녀협神女峽(옛 이름은 기정妓亭), 4곡은 백운담白雲潭, 5곡은 명옥뢰鳴玉瀨, 6곡은 와룡담臥龍潭(동쪽에 농수정 위치), 7곡은 명월계明月溪, 8곡은 융의연隆義淵, 9곡은 첩석대疊石臺. 각 곡마다 유려한 시가 있고 의미 있는 내용도 덧붙이고 있다. 구곡과 더불어 단풍은 한반도 여느 산 못지않은 절경을 이룬다. 계곡이 좋아 여름도 좋지만 가을에도 아름다운 단풍을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지도에서 화악이란 지명은 16세기 제작한 <동람도>에서부터 17세기 <동여비고>, 18세기 <군현지도>, 19세기 <고지도첩>과 <대동여지도>에도 어김없이 같은 지명으로 등장한다. 일제가 정리한 <조선지지자료>에도 소개된다. 2,000년 가까이 화악이란 지명으로 그대로 사용된 유서 깊은 명산인 것이다.
화악산 등산로는 경기도 가평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서 올라가는 코스로 나뉜다. 경기도 가평군 홈페이지에는 아예 산에 대한 소개조차 없다. 화천군 홈페이지에는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강원도권에 가깝다는 얘기다. 실제로 가평에서 등산하는 사람들은 난이도가 높은 화악산보다 석룡산이나 명지산 등으로 향하는 경우가 더 많다.
▲강원도 화천군에서 출발하는 등산로는 화악터널 입구에서 시작한다. 바로 급경사로 올라간다. 화악터널 입구가 해발 800m 이상 된다. 군부대를 우회해서 중봉까지 올라간다. 군사도로 겸 임도로 중봉 아래까지 가는 방법도 있으나 군사도로가 너무 길어 지겨울 수 있다. 화악터널 입구에서 정상까지 3시간 남짓 소요. ▲ 가평 화악리 건들리에서 중봉으로 향하는 코스도 있다. 약 6km에 4시간 정도 소요. 가파르고 힘든 건 감안해야 한다. ▲가평 적목리 가림에서 중봉으로 가는 코스는 5.4km 3시간 30분 이상 소요. ▲가평 적목리 삼팔교에서 중봉으로 가는 코스는 약 5.5km에 4시간 정도 걸린다. 산이 높고 등산로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산행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석룡산에서 종주하는 코스도 있다. 중봉 정상에서 석룡산까지는 4.1km. 시간만 넉넉하다면 하루 코스로 잡고 종주할 수 있다.
본 기사는 월간산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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