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후궁은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는 그림자들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왕이 되어도 그녀를 ‘왕의 어머니다!’라고 복권해 주는 것만 해도 하세월이 걸렸다. 칠궁을 걸으며 마음이 심란해진 것은 꼭 떠나는 가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문에서 본 재실과 가을이 깊어진 북악산 모습
▶궁궐이 아니라 사당이다
칠궁은 일곱 채의 집이라는 뜻이다. 조금 더 자세히는 귀신이 사는 일곱 채의 집으로 해석할 수 있다. 궁궐의 궁 자는 집 궁(宮) 자이지만, 그 뜻 가운데에는 귀신이 사는 집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 칠궁은 청와대 안에 위치한 조선의 유물이다. 칠궁은 오래 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곳이다. 청와대 분수대 교차로에서 부암동으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 담장 안으로 단정한 기와 지붕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썩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궁은 일반 유물처럼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쉽게 마음 먹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코로나19 문제로 그나마 제한적으로 개방하던 것마저 중단돼 가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움을 주었다. 반면 칠궁에게는 고요한 휴식의 기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칠궁은 이름도, 사당도, 정원도, 주변 경관도 어여쁜 곳이지만 그 역사를 들여다 보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곳이다. 칠궁 안에 왕족과 사대부가 나눠 가진 조선의 편협한 사상과 차별, 독점, 편견 등이 모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칠궁의 출발이 어머니가 왕의 어미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 왕들의 효심의 발로였다. 이러한 사실은 또 다시 조선이라는 나라가 누구의 것이었느냐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칠궁은 영조의 효심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게 맞다. 알려진 대로 영조의 어머니는 숙종의 후궁인 숙빈최씨이다. 죽은 뒤 받는 이름인 시호는 화경이다. 그녀는 일곱 살 때 궁궐에 들어와 무수리로 지내다 숙종의 눈에 들어 1693년에 아들 영수를 낳았으나 두 달 만에 죽었다. 다음해에 다시 임신했는데, 그 때 낳은 둘째가 연잉군(이금)으로, 훗날 영조가 되는 왕자의 탄생이었다. 왕의 눈에 띄어 침실에 들고 2년 연속 아들을 낳았으니 최 씨는 무수리 신분에서 내명부 종4품–종2품 숙의–종1품 귀인를 거쳐 숙종25년 1699년에는 단종 복위 기념으로 정1품 빈의 지위를 받으며 숙빈최씨가 되었다. 정1품이면 조선에서 제일 높은 관직이다. 숙종의 왕자를 낳고 정1품까지 올랐으니 일곱 살 때 궁궐에 들어와 무수리로 살던 여자의 삶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그러나 정1품에 올랐다고 무수리 출신 후궁이라는 주홍글씨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외삼문, 풍월헌 등으로 들어가는 재실 정문.
영조는 숙종과 희빈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경종의 배다른 동생이었고, 경종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조선 최초로 세자가 아닌 세제 책봉을 받는다. 왕의 동생으로 왕의 대를 잇는다는 뜻이다. 일련의 모든 일들은 당시 경종, 영조의 생각이었으나 이것은 계획대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노론, 소론 등 실질적으로 나라의 주인 행세를 한 정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왕, 백성, 국가를 조정한 결과였다. 영조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도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라는 이유로, 왕비의 자식이 아닌 후궁, 그것도 무수리 출신 후궁의 자식이라는 점 등을 들이대며 능멸을 서슴지 않은 사대부들에 의해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영조는 즉위 이후에도 ‘우리 덕에 임금이 되지 않았소’라는 특정 정파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긴 51년7개월 동안 왕으로 지냈고 수명도 81세5개월이라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천수라 할 만큼 오래오래 살았다. 51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니 그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싶지만, 특히 그는 어머니 숙빈최씨를 제대로 대우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했다.
풍월헌 송숙제 삼락당을 아우르는 뜨락. 이 시설들은 모두 영조와 칠궁 관리를 위해 건축되었다, 삼락당, 한 건물에 있는 송숙제와 풍월헌
효도 하면 정조를 떠올리곤 하지만,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극진함 또한 그에 못지 않다. 숙빈최씨는 숙종 44년 1718년에 죽었다. 그녀의 나이 49세 때의 일이었다. 장례는 조선의 법도에 따라 거행되었으나 명당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명당을 추천한 사관을 귀양 보내는 등 그나마 후궁으로서 대접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기록은 숙종이 숙빈최씨를 미워한 결과라고 되어 있으나 사실 정파 간의 피 튀기는 싸움에 말려들 수 없는 왕의 고뇌가 추측되기도 한다. 숙빈최씨는 이렇게 왕자의 어미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말년을 보내다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아들이 왕이 되는 그 영광도 맛보지 못한 채 말이다. 어미의 쓸쓸한 죽음을 보면서도 숨 죽인 채 살아야 했던 영조의 심정은 또한 어떠했을까. 칠궁의 출발은 바로 이런 복잡하고 억울하며 저주스럽고 답답한 마음에서 출발했다.
▶왕도 어쩌지 못하는 그놈의 법도
중문으로 들어가야 본격적인 사당들을 만날 수 있다, 육상궁으로 들어가는 삼문. 삼문의 가운데 문은 귀신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다. 사람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오는 게 조선이 예법이다, 보광사
칠궁 관람은 재실 정문에서 시작된다. 칠궁은 북악산과 청와대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고립된 섬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청와대가 붙어 있어서 그쪽을 향해서는 사진을 찍는 일도 금지되어 있고, 서쪽과 북쪽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게다가 북악산은 청와대 외곽 경비를 위한 군부대가 상주하고 있어서 얼씬도 할 수 없다. 오로지 남쪽 재실 정문과 외삼문으로만 들어갔다 나올 수 있다. 외삼문은 특별한 행사가 있지 않는 한 늘 닫혀있으므로 일반 관람객은 오직 재실 정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다. 재실 정문으로 가려면 길 건너편 무궁화 동산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칠궁으로 향하는 횡단보도 신호등이 파란색이 되었을 때 비로소 길을 건널 수 있고, 그때서야 외삼문 옆 안전 펜스도 열린다. 재실 정문은 고궁이나 전통 한옥에서 흔히 보아왔던 평범한 모습이다.
필자가 찾은 그날 칠궁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깨끗한 마당, 심지어 소담스럽게까지 보이는 하마비, 재실와 업무 공간으로 사용했었다는 송죽재, 풍월헌, 삼락당의 단정한 지붕 뒤로 멀어져 가는 가을이 절정의 색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뒤로는 북악산 봉우리가 통째로 눈에 들어오고 있다. 이곳이 경복궁인지, 자그마한 칠궁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제사를 위해 육상궁을 찾은 영조가 휴식하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풍월헌, 육상궁을 관리하던 공무원들의 업무 공간이자 한때 영조의 어진을 모셔두었던 송죽재, 그리고 숙빈최씨에 대한 존경심을 높이기 위한 크고 작은 행사와 토론이 펼쳐지곤 했던, 응접실 역할을 하던 곳이 삼락당이다. 풍월은 ‘맑은 바람, 밝은 달’을 뜻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영혼을 만나는 고귀한 마음가짐을 뜻하고 있다. 삼락이란 가족의 안녕, 후학 양성, 윤리 등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즉 유교적 선과 좋은 의미의 언어들을 압축한 뜻을 지니고 있다. 보통 한옥, 궁궐의 구조를 보면 옆면에는 창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풍월헌의 동쪽 옆면은 창과 문이 달려 있다. 어머니의 영혼을 거리낌 없이 만나겠다는 영조의 애틋한 표시일 것이다.
풍월헌 뒷마당에는 담장이 있고 동쪽으로 중문이 나 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중문으로 들어서니 정면에 삼문이 있다. 세 개의 문을 나란히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당 입구는 주로 삼문을 설치한다. 세 개의 문에서 가운데 문으로는 귀신이 들락거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제를 지내거나 예를 갖추고, 왼쪽 문으로 나오는 것이 예법에 맞는 일이다. 삼문 안에는 연호궁과 육상궁이 하나의 건물 안에 있다. 따로 짓지 않고 하나의 건축물에 두 사람의 신위를 모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창덕궁 건너편 종묘가 대표적인 예다. 종묘는 정전 안에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위와 49위를 모셔두었다. 또 하나의 건축물인 영녕전에도 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 영녕전 모두 하나의 지붕이다. 칠궁의 건축물들이 분리되어 있는 게 오히려 위엄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조선의 법도란 무엇인가
정면에 연호궁 편액이 걸려있지만 그 뒷쪽에 육상궁(육상묘) 편액이 따로 걸려 있다, 보광사
연호궁과 육상궁이 있는 건축물에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앞에 보이는 것은 연호궁, 뒤에 걸려 있는 것은 육상궁이다. 육상궁이 먼저 생겼으므로 그 후에 설치된 연호궁의 편액이 앞에 걸리게 된 것이다. 영조는 자신의 친어머니가 죽었을 때 조정에서 거행한 예장에 대해 아무 소리 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평민의 장례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으나 누구도 장례 자체에 시비를 걸진 않았다. 영조가 어머니를 왕의 어미로 제대로 대접하기 위한 작업은 본인이 왕에 즉위한 직후부터였다. 영조는 즉위와 동시에 경복궁 북쪽, 그러니까 지금의 칠궁 자리에 어머니 숙빈최씨의 사당을 짓게 하고 신주를 모셨다. 숙빈최씨의 묘소의 이름은 소령원이었다. 조선 왕실의 분묘제도에 따르면 왕과 왕비의 묘에는 ‘능’ 자를 붙이고, 왕세자, 왕세자비, 숙빈최씨처럼 후궁이지만 자식이 왕위에 오른 경우 ‘원’ 자를 붙였다. 그 밖에도 왕의 후궁이었지만 왕의 어미가 되지 못한 후궁, 왕자, 공주, 옹주의 묘는 ‘분묘’라 불렀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숙빈최씨가 죽었기 때문에 그의 묘는 후궁의 묘, 분묘로 조성되었었다. 훗날 영조는 어머니의 분묘를 소령묘, 소령원으로 승격시켰고, 숙빈최씨의 영혼을 위한 수행처로써 보광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보광사 안에는 특별히 어실각이라는 누각을 만들어 그 안에 숙빈최씨의 위패를 따로 보관했다. 또한 영조는 어머니에게 화경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 격식에 이름까지, 그러니까 족보를 분명히 한 것이다. 영조는 숙빈최씨의 무덤 격상을 통해 명예를 높여주고 경복궁 뒤에 사당을 만들어 신주를 모시고, 시호(이름)까지 선사하는 것으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표현했다. 칠궁이 생긴 계기가 숙빈최씨와 그의 아들 영조에 의한 일이었으니 사실상 칠궁의 주인공은 이곳 육상궁이라 할 수 있다.
육상궁과 함께 있는 연호궁은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의 사당이다. 정빈이씨는 영조에게 장남 효장세자를 선사한 후궁이었다. 효장세자는 그러나 아홉 살의 나이에 죽었고, 그 다음에 태어난 아들이 사도세자였다. 사도세자는 역시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이야기는 현대까지 역사적 사실로 이어오고 있다.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당시에는 혜빈 홍씨) 사이에서 아들 산을 낳았고, 산은 훗날 정조가 되어 조선 정치사에 굵은 획을 그었다. 정조는 세자의 아들이었지만, 폐세자가 된 사도세자의 아들 자격으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해서 영조는 산이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다. 아홉 살에 죽은 효장세자가 정조의 아버지가 되어버리니, 당연히 효장세자는 진종이라는 이름의 왕으로 추존되었고, 효장세자의 왕세자비였던 정빈이씨 역시 추존 왕비가 되어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연호궁은 원래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경복궁 서쪽 옆길 효자로 19 일대, 지금은 터의 일부만 남아 있다)에 있었으나 고종 7년 1870년에 육상궁 별묘로 옮겨진 뒤 육상궁과 합쳐졌다.
▶조선은 정녕 왕의 국가였나
사당 세 채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수빈박씨의 묘소. 휘경원은 광릉 안에 위치한다(사진 문화재청), 냉천이 흘러들어오는 연못 자연과 냉천정. 칠궁 풍광의 대표적인 관람 포인트 중 하나이다.
육상궁을 나와 서쪽으로 조금 걸으면 냉천정을 만날 수 있다. 어머니의 제사 때면 이를 추모하던 영조의 공간이었다. 냉천정 역시 풍월헌과 마찬가지로 한옥 옆 면에도 문이 달려 있어서 어머니의 영혼과의 교감을 소망한 영조, 유교국가 조선의 풍속을 읽을 수 있다.
사실 칠궁을 걸으면서 제일 보기 좋고 재미있던 공간이 냉천정 일대이다. 이 건물의 이름이 냉천정이 된 것은 바로 옆 냉천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냉천에서 솟아오른 물은 수로를 따라 흘러가 냉천정 앞에 있는 자연이라는 이름의 연못으로 모인다. 자연과 냉천정을 마주 보고 자연 오른쪽 끝부분에서 사진을 찍으면 냉천정과 자연에 비친 냉천정 풍경을 담을 수 있다. 칠궁은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대부분 작품이 된다(물론 렌즈를 청와대 방향으로 향하면 해설사로부터 단박에 지적을 당하게 된다). 누구나 칠궁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냉천정 앞에서의 촬영 순간이 좋았다. 냉천정 촬영 포인트를 해설사께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는데, 하늘과 물과 사물이 하나의 프레임에 담긴다는 것이 신비했다.
냉천정 뒤로는 작은 뜨락이 있는데, 담장 옆에 원두막 같이 생긴 정자 한 채가 있다. 그런데 그 정자로 향하는 길이 어디에도 없다. 아예 뜨락으로 접근할 방법도 없다. 칠궁이 돌아가신 왕의 어미들의 신주를 모신 곳이니, 이곳의 정자 역시 그분들께서 휘휘 날아 와 엄격했던 법도 국가 조선을 추억하곤 했던 게 아닐까 상상해본다.
서쪽 삼문으로 들어가면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이 있다.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은 나란히 서 있는데, 어떤 궁은 기둥이 둥글고 또 어떤 궁의 기둥은 사각 모양이다. 또한 문살의 형태도 궁에 따라 생긴 게 달랐다. 지금은 한 곳에 모여 있지만, 각각의 사당이 건립될 때만 해도 건축가와 해석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이자 추존왕인 원종의 어머니 신주를 모신 곳이다. 저경궁을 지어 모실 것을 명한 왕 역시 영조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을 조선 왕실의 법도 안에 넣으려는 시도를 치밀하게 했다. 인빈김씨의 정경궁과,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선희궁 등 자신 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어머니들의 사후 관리를 골고루 체계적으로 함으로써 어머니 숙빈최씨의 신분 격상의 명분을 쌓아간 것이다.
인빈김씨 남양주 순강원(사진 문화재청), 정조의 후궁 수빈박씨의 경우궁
저경궁 옆 대빈궁은 장희빈, 희빈장씨의 사당이다. 희빈장씨는 숙종의 후궁이 된 후 숙종이 왕위를 계승한 경종의 어머니였고, 끝내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결국 폐비된 후 사약을 먹어야 했던 굴곡의 인생이었다. 어느날 궁궐에 입궁하는 사람 뒤에는 늘 특정 정파의 사연과 계획이 있었다. 입궁한 여인이 왕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역시 그녀를 입궁시킨, 또는 입궁 뒤 특별한 관계를 맺은 정치 세력의 움직임이 인다. 그 과정에는 늘 암투가 따랐다. 왕은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은밀한 협박을 가해오는 정치 세력에 의해 진심으로 사랑하는 후궁, 심지어 왕비까지 내치거나 죽여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곤 했다. 오늘의 가치로 볼 때 국가는 국민의 것이다. 반면 조선이라는 봉건사회는 왕과 사대부가 소유한 국가였다. 그중 왕의 권력을 넘어설 세력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칠궁의 뒷얘기만 찾아보아도 조선의 왕들은 결코 절대 지존으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법도를 들이대며 왕의 마음까지 움직이려 했지만 그 왕이 끝내 뜻을 달리하면 정치 세력에 의해 권력의 중심이 뒤바뀌었던 나라. 조선은 결코 왕의 나라는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상상도 하게 된다.
그 다음은 선희궁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사당으로 1908년부터 경우궁과 함께 있다. 경우궁은 정조가 사랑했던 후궁 수빈박씨의 사당이다.
덕안궁은 삼문과 마주보는 마당 한가운데에 있다. 고종의 후궁인 순헌귀비엄씨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엄씨는 원래 경운궁(덕수궁) 안 경선궁에 살았으나 1911년 세상을 뜨자 이름을 덕안궁으로 바꿨고, 1913년 덕수궁 근처에 사당을 새로 지어 모시다 1929년 칠궁 안으로 들어왔다.
칠궁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곳에 들어와 있는 왕의 어머니들은 살아 생전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왕자를 생산했을 때에도 호사를 누리며 사는 대신 정쟁의 살얼음판을 살금살금 걸으며 살아야 했던 운명들이었다. 왕의 어머니가 대접을 받는 게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워서야.
칠궁은 영원히 알 수 없을 조선의 복잡한 법도, 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파 간의 암투, 여전히 풀리지 않는 여성의 옥죄인 삶 등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눈은 호사롭지만 마음은 복잡해진다. 어떤 의미에선 진짜로 귀신이 나오는 집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재실 문 밖 오늘의 세상으로 나왔다. 이곳에 계시는 모든 왕의 어미들의 명복을 빌면서 말이다.
Tip 칠궁 관람법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칠궁 관람’을 검색하면 경복궁 사이트로 연결된다. 해당 페이지에서 칠궁 관람일을 예약할 수 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관람 가능하다. 시간은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등 7회로 모든 관람은 해설사가 운영한다. 회당 50명까지 예약을 받는데, 간혹 자리가 비거나 노쇼 예약자가 생기곤 한다. 사전 예약을 하지 못했다면, 칠궁 건너편 무궁화동산 안내부스에 가서 관람 가능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노쇼 예약자가 없을 경우엔 관람이 어려우니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예약을 마치도록 하자.
[글 이영근 사진 이영근, 문화재청 참고 자료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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