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의 개수는 368개(실은 400여 개). 오름에 대한 이야기는 무한대다.
억새 명소 따라비오름
●368개, 그 이상의 이야기
재밌는 질문을 만났다. 한라산은 왜 오름이 아닌가요? 한 지식인(?)은 답했다. 너무 커서 그렇다고(맞긴하다. 한라산은 남한 최고봉이니까. 1,950m). 오름은 소화산체니 규모의 차이야 당연하고 태생적으로 다른 독립화산이다. 가끔 오름이 볼록볼록 엠보싱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우기기를 더하자면, 오름도 엠보싱도 열과 압력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오름과 딱 맞아떨어진다. 양보를 좀 하자면, 수만년 지질 활동(대부분의 오름은 홀로세에 형성됐다)의 결과인 오름의 연륜과 비교해 그 어감이 좀 가벼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핑계를 대자면, 내게 오름은 엠보싱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심리적 완충지대라고, 다시 힘주어 주장해 본다. 시인의 언어로는 ‘어머니 젖가슴’ 같은 것이 오름이다.
오름이 검다 하여 동거문이오름
15년 전쯤에 제주 오름 특집 취재를 위해 3박 4일 동안 오름만 오르내렸던 여행을 시작으로 거의 모든 제주 여행에 오름이 있었다. 사실상 오름을 스치지 않고 제주 내륙을 여행하는 방법은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추천하는 오름이 있으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 달랐다. 제주에 오름이 368개(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나 되니, 제주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오름도 다양할 수밖에.
한라산의 축소판 손지오름
습지를 품고 있는 물영아리오름
그래서 제주 오름에 대한 나름의 이야기는 368개를 한참 전에 초과해 무한대로 커지는 중이다. 굳이 말하라면 제주 오름을 오른 사람의 수만큼 누적되는 중이다. 같은 오름을 또 올라도 계절마다 다 다르고, 기분에 따라서도 다 다르지 않나. 사진가 김영갑 선생이 20년을 반복해 담은 오름의 풍경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 꼭 가 보시라). 제주의 흙, 돌, 숲, 바람뿐 아니라 제주의 사람도 매일 오름에서 피고 진다. 각자에게 아끼는 오름, 궁금한 오름, 눈이 오면 가고 싶은 오름 하나쯤 있어야 제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
●오름의 진심은 붉다
이 오름이 붉은 이유를 알게 되면,
물들게 되고, 좋아하게도 된다.
이번에는 붉은오름이었다. 뭔가 비장미 넘치게 ‘붉은’ 이름의 이유는 공식적으로 붉은 화산 송이(scoria) 때문이다. 속설로는 고려 때 여몽연합군에 끝까지 대항했던 삼별초 병사들이 흘린 피가 물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전장이 드넓었던 걸까, 제주에는 붉은오름으로 불리는 오름이 5개나 있다. 그중 가시리의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이 가장 대표적이다.
붉은오름 트레킹 코스 입구의 삼나무숲
붉은오름 삼나무숲
붉은오름 전망대로 향하는 동안 자연스레 그 적토를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시선의 방향은 반대로만 향했다(길에는 야자수매트가 깔려 있기도 했었다). 50년 이상 하늘로 쭉쭉 올라간 삼나무와 해송은 높이를 헤아리기 어려웠고, 중턱으로 올라서자 그날따라 유난했던 바람에 휘청거리는 낙엽수림이 하늘을 쉴 새 없이 비질하고 있었다. 환호작약하는 나무와 바람의 소란 속에 멈춰 서니 오히려 다가오는 온전한 평안. 제주의 자연에 발 담그며 몇 번이나 맞이했던 이런 순간마다, 눈뜨면 그 자리가 오름이곤 했다.
전망대에서 본 한라산과 오름
익으면 빨개서 예쁘지만 독성이 있는 천남성 열매
350m의 짧고 굵은 트레킹 끝에 붉은오름 정상(표고 569m, 비고 129m)의 전망대에 오르니, 대놓고 터지는 감탄. 파노라마와 펼쳐지는 오름 너머로 천지창조의 하늘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은총을 집중적으로 받는 곳에 한라산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가깝게 잘 보여서 전망 안내판에 이름을 올린 오름만 해도 민오름, 사려니오름, 머체악, 절물오름, 물찻오름, 말찻오름 등 13개나 된다. 오름과 오름 사이의 푸른 목장과 초원에 붉어지는 건 마음이다. 참으로 제주다운, 제주스러운 시간. 내려올 때는 지름 100여 미터의 분화구 둘레를 돌아 더 천천히, 오랫동안(1.5km) 내려오는 코스를 선택할 수도 있다.
붉은오름 전망대를 향하여
자연휴양림답게 붉은오름자연휴양림에는 상잣성 숲길(2.7km), 말찻오름도 연결되는 해맞이 숲길(6.7km), 무장애 나눔 숲길(1.1km)뿐 아니라 야영장, 숙소, 세미나실, 광장, 야외공연장, 공원, 놀이터 등 다양하게 편의시설과 경관이 있다. 전날 도착해 야영을 즐겼다는 사진가에게 ‘좋은 건 혼자서 다 한다’는 타박만으로 얼굴을 붉혔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붉은오름자연휴양림
주소: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남조로 1487-73
설문대 할망이 오름에 누웠다. 오름 디자인 수상작 ‘다채로움 오름’ by 조연경 ⓒ제주영상ㆍ문화산업진흥원
●오름을 상상하고, 듣고, 그리다
2021 제주오름 콘텐츠DAY개최
오름을 자연유산이나 경관자원으로만 보지 않고 문화자원으로 보는 시각. 이것이 다소 생소한 제주오름 콘텐츠DAY의 이유다. ‘오름이 문화라고?’ 갸우뚱할 시간은 불과 몇 초뿐. 우리가 기대어 사는 대지에 가장 깊게 뿌리내리는 것이 문화라면, 오름은 당연히 제주의 문화를 키우는 붉고 건강한 토양이다.
붉은오름을 소재로 한 웹소설과 애니메이션에 대한 토크쇼
오름에 대한 상상력의 향연
오름의 문화를 심고, 키우고, 수확하는 자리. ‘문화로 커 가는 오름: 오름을 재해석하다’라는 주제로 오름 콘텐츠의 향연을 펼친 날이 바로 10월23일 ‘2021 제주오름 콘텐츠DAY’였다. 제주시 신산공원으로 한가한 토요일 산책에 나섰던 시민들이 오랜만에 들려오는 라이브 음악 소리에 하나둘씩 제주영상ㆍ문화산업진흥원으로 모여들었다.
가수 선우정아의 축하 무대
올해 오름 콘텐츠의 주인공은 ‘붉은오름’이었다. 워낙 사연 있는 오름이라, 다양한 이야기의 소재로 활용되기 좋았고, 강렬한 붉은 이미지는 상상력을 활활 태우기 좋기도 했다. 축제는 하루지만, 콘텐츠는 하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직접적으로는 제주 오름을 주제로 한 디자인 공모전과 붉은오름을 소재로 한 웹툰 공모전을 실시했다. 지난해 디자인 선정작의 경우 의류 브랜드 휠라코리아와 협업하여 한정판 제품으로 선보일 수 있었고, 올해는 카카오프렌즈를 통한 활용이 논의 중이다. 이 밖에도 애니메이션, 웹소설, 음악 등 제주영상ㆍ문화산업진흥원에서 진행 중인 다양한 콘텐츠 사업에서도 자연스럽게 오름과 관련된 콘텐츠들을 쌓아 왔다.
붉은오름을 다룬 웹툰 공모전 전시
제주오름 콘텐츠DAY는 한 해 동안 수확한 오름 관련 콘텐츠를 펼쳐 놓고 즐기는 시간이었다. 야외무대에서는 오후 내내 이야기와 음악이 흘러나왔다. ‘제주콘텐츠코리아랩 콘텐츠발굴 창작토크쇼’는 제주 현지의 애니메이션 제작 업체인 ‘그리메’ 신주영 대표, 웹툰 <명량>의 박은우 작가와 함께 창작 중인 애니메이션 <붉은오름>과 웹소설에 대해 소개하고 오름의 가치를 소통했다. 제주 오름무용단의 공연에서는 붉디붉은 천이 넘실거렸고, 제주음악창작소의 지원을 받아 노래를 만든 어쩌다밴드, 더퐁낭, 섬의 편지, Ro*soulful, 유진영, 지예홍의 무대에 이어 가수 선우정아의 축하 공연이 행사의 절정을 이뤘다. 제주 콘텐츠 기업들이 제작한 소소한 체험 키트를 보내 주는 ‘제주 콘텐츠 박스’는 축제 전에 일찌감치 마감되는 호응을 얻었다.
“이 축제에는 오름을 문화콘텐츠로 육성하는 것과 더불어 코로나로 특히 어려웠던 문화산업 종사자들을 지원하는 마음도 담겨 있다”는 제주영상ㆍ문화산업진흥원 문화산업팀 이윤성 팀장의 말대로 오름을 통해 모두가 소통한 날이었다.
제주오름 콘텐츠DAY
제주오름이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오름의 문화콘텐츠로서 가능성을 선보이는 체감형 축제. 제주특별자치도와 (재)제주영상ㆍ문화산업진흥원이 개최하는 제주콘텐츠페스타의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글 천소현 기자, 사진 김민수
취재협조 제주영상ㆍ문화산업진흥원
세상의 문을 여는 '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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