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입력 2021. 10. 12. 05:01 수정 2021. 10. 12. 06:14
'오늘 처음 친구를 죽였습니다.' 2000년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배틀로얄'은 이런 광고 문구로 일본 사회에 충격을 줬습니다. 다카미 고슌(高見広春)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실업률이 15%에 달해 혼란이 극심해진 일본이 배경입니다. 청소년들에게 강한 생존능력을 키워준다며 정부가 중학생들을 무인도에 몰아넣고 서로를 죽이는 게임을 시킨다는 내용이죠.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잔인한 설정과 묘사 때문에 '이런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줘도 되는가'로 국회에서 설전이 벌어지기까지 한 '문제작'이었습니다.
2000년 일본에서 개봉돼 큰 반향을 일으켰던 영화 '배틀로얄'의 한 장면. [인터넷 캡처]
이 작품은 외딴곳에 모인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게임을 하는 '데스게임' 장르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타임지가 선정한 21세기 화제작에 선정됐고, '킬 빌'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극찬을 했죠. 이후 일본에선 데스게임물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았습니다. 주로 만화가 원작인데 영화·드라마화된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라이어 게임'(2007), '도박묵시록 카이지'(2009), '간츠'(2011), '인랑게임(2013), '신이 말하는 대로(2014)', '아리스 인 보더랜드(2020)'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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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는 게임도 일본이 원조?
그래서일까요. 전 세계적으로 화제인 한국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유독 냉랭합니다. 일본 넷플릭스에서도 연일 시청률 1위에 올라있지만, 주요 신문이나 방송 등에선 관련 내용을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 '기생충', '사랑의 불시착', 방탄소년단(BTS) 등 한국 문화 콘텐트를 대대적으로 조명하던 모습과 대조적이죠. 소셜미디어(SNS)에도 처음엔 '새롭지 않다' '일본 작품들을 베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국판 데스게임 드라마 '오징어게임'. [넷플릭스]
황동혁 감독 자신도 인정한 대로, '오징어 게임'에선 일본 데스게임물의 영향이 느껴집니다. 빚더미에 오른 주인공이 한탕을 위해 게임에 참가한다는 설정은 '도박묵시록 카이지'와 흡사하고, 피가 튀는 잔인한 장면은 '배틀로얄'을 떠올리게 하죠. 첫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일본에도 '달마상이 넘어졌다(だるまさんが轉んだ)'라는 동일한 규칙의 게임이 있고, '신이 말하는 대로'라는 영화에도 등장합니다.
거기에 '달고나(뽑기)' 게임도 '카르메야키(カルメ焼き)'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존재하고, 줄다리기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전통 놀이이기도 합니다. '오징어 게임' 마저 일본에 유사한 놀이가 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역사적으로 깊이 얽혀있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일본인들로 하여금 이 작품에 박한 평가를 내리게 만드는 것이죠.
학생들이 폐쇄된 공간에서 일본 전통 인형들과 싸운다는 내용의 일본 영화 '신이 말하는 대로'. [인터넷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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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이 비슷? 그런 건 상관없잖아"
하지만 '오징어 게임'의 인기가 식지 않고 외신에서도 각종 찬사가 쏟아지자 반응이 조금 달라지고 있습니다. "데스게임이 일본발(發) 장르인 건 맞다. 그런데 왜 한국 작품만 이렇게 세계인의 호응을 얻는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특히 지난해 넷플릭스가 제작한 '아리스 인 보더랜드'와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일본에서 시청률 1위에 오르며 꽤 인기를 모았습니다만, 세계적인 반향은 없었죠.
넷플릭스가 2020년 공개한 데스게임 드리마 '아리스 인 보더랜드'. [넷플릭스]
유명 방송작가인 스즈키 오사무(鈴木おさむ)는 일본 주간지 '아에라'에 쓴 글에서 '오징어 게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설정만 들었을 땐 '이거 카이지잖아'라고 생각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그런 건 상관 없다'는 기분이 되어버린다"고요. 설정은 새롭지 않지만 등장인물들의 매력이나 작품 자체의 흡인력이 남다르다는 평가입니다.
문화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쓰타니 소이치로(松谷創一郎)는 야후 재팬에 실린 글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데스게임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가벼움'인데, '오징어 게임'은 그 가벼운 소재를 '무겁게' 그려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초반과는 달리 최근 일본의 데스게임물은 사회적 맥락을 제거한 채 '게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죠. 장르 자체가 "축소 재생산"되면서 '장르물'로서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 장르에 익숙지 않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는 지적으로 읽힙니다.
'오징어 게임'과 설정 면에선 가장 흡사하다는 평을 받는 '도박묵사록 카이지' 영화판 포스터. [인터넷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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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는 안 되고 '오징어 게임'은 되고
10일 일본 트위터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올라와 2000명 넘는 사람들에게 '좋아요'를 받았습니다. "우선 같은 넷플릭스의 '아리스 인 보더랜드'가 왜 붐을 일으키지 못했는지 냉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표절이라고 야유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데스게임) 작품군을 가진 나라가 '오징어 게임'을 만들어낼 수 없었던 건 역시 반성해 앞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사족입니다만 일본에서 '배틀로얄'이 히트한 2000년대 초반은 거품 경제 붕괴로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며 약자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던 시기였습니다. 실업 문제, 학생들의 등교 거부 등이 연일 뉴스가 됐죠. 그런 시대였으니 '내가 살기 위해선 상대를 죽여야 한다'를 직설적으로 그린 이 작품이 논란 속에서도 '호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지금 '오징어 게임'이 나온 것도 어떤 시대적 징후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 마냥 환호하긴 힘들어집니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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