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가] 이나겸 미술감독
넷플릭스 시리즈 ‘고요의 바다’ 이나겸 미술감독이 지난 3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사진 촬영에 응했다. 국내에선 불모지와 다름없는 SF 장르에 처음 뛰어든 이 감독은 “어렵지만 즐거운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길을 닦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고요의 바다’는 국내에서 달을 배경으로 만든 첫 공상과학(SF) 작품이다. 우리나라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SF 장르의 불모지나 다름없다. 경험은 없고 예산은 제한돼 있었다. 시청자들의 눈은 까다로워졌다.
‘고요의 바다’ 속 공간을 만든 이나겸(47) 미술감독은 그럼에도 “미술적인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장르를 만나는 건 설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감독에게도 SF 장르는 처음이었다.
해외 콘텐츠로만 보던 SF 드라마를 국내에서 만든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3일 서면으로 만난 그는 “최항용 감독의 대학 졸업작품이었던 동명의 단편을 봤을 때 참신하면서도 개연성 있는 설정이 매력적이었다”며 “미래의 세계관을 상상으로 구현해야 하는 SF는 늘 해보고 싶었다”고 돌이켰다.
드라마의 주요 무대는 달에 있는 발해기지다. 달 표면을 어떻게 사실적으로 구현할지, 발해기지의 규모를 어떻게 잡을지 고민이 깊었다. 최 감독이 연필로 그린 콘셉트 스케치가 세트 구상의 출발점이 됐다.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 같은 지형의 절벽 위에 작은 기지가 있는 입면도 형식의 그림이었다.
‘고요의 바다’에 등장하는 달 위의 발해기지 모습. 최항용 감독의 스케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아래는 여러 사건이 벌어지는 이곳 복도 중 하나. 넷플릭스 제공
우주항공국 대원들은 물이 부족한 지구로 월수(月水)를 가져가기 위해 목숨을 건 여정을 시작한다. 이 감독은 “작품엔 안 나오지만 기지보다 몇십 배 큰 거대한 월수 덩어리가 기지 아래에 얼음 형태로 박혀있는 그림이 인상적이었다”며 “얼음덩어리의 크기가 기지의 규모와 디테일을 결정하는 이미지가 됐다”고 설명했다.
중요 자원인 월수를 비밀리에 연구하는 실험실, 대원들의 숙소와 지하저장고 등의 공간이 단계적으로 증축되는 방식으로 기지의 형태가 완성됐을 거란 상상을 붙였다.
작품 속 공간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는 건 예상된 일이었다. 경기도 파주·고양·이천 등지에 5개 동의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그 안에 약 20개의 세트를 짓고 부수고 바꾸기를 반복했다. 세트 촬영은 약 6개월간 진행됐다.
월수를 연구하다 5년 전 폐쇄된 발해기지는 의문과 위험이 가득한 군사적 요새로 콘셉트를 잡았다. 기지 내 복도와 환기통로의 천장을 낮춰 공간을 통해 공포와 압박감을 보여주려 했다. 복도는 각종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달의 지면이 보이는 원형 복도, 통제실로 가는 복도, 연구원들의 시체가 널린 복도, 방호문이 내려오는 복도, 월수가 범람하는 침수 복도 등 다양한 복도를 만들어야 했다.
이 감독은 “주어진 예산을 갖고 미리 대여한 스튜디오 공간 안에 발해기지의 규모를 짐작게 하는 복도를 만들어 넣는 게 가장 큰 숙제였다”며 “500평 규모의 스튜디오를 가변형으로 만들고 다양한 사건이 벌어지는 복도 공간 장면을 여러 가지 복도 모음세트를 만들어 촬영했다”고 설명했다.
발해기지 중앙통제실 세트에서 촬영 중인 장면. 넷플릭스 제공
달 지면 세트는 300평 사이즈로 제작됐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달 표면과 유사한 우주 환경을 재현한 공간이 있다는 얘길 듣고 직접 찾아가서 봤다. 국내에서 제작한 인공 월면토(달 표면의 흙)를 찾아 만져보고 구입해 세트에 비슷한 질감을 표현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위성사진도 참고했다.
달 표면을 통해서도 여러가지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착륙선에서 탈출한 대원들이 발해기지로 이동하는 장면에선 잔잔하고 굴곡 없는 표면을 연출해 불시착 상황의 황당하고 막막한 분위기를 보여줬다. 기지로 걸어가다가 대원 한 명이 죽는 장면에선 바위를 곳곳에 배치해 시신을 묻어두고 가도 좋을 것 같은 고요한 운치를 표현했다.
그는 “세트장의 한쪽 벽면엔 LED 월을 세워 버추얼 프로덕션 기술을 활용했다”면서 “벽면에도 달 지면을 넓게 펼쳐 세트를 연장하는 효과를 냈다. 후반 작업 시간을 줄여주는 기술이지만 배우들이 연기할 때도 상상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슴 철렁한 일도 있었다. 지난여름 임진강 줄기의 둑방 근처에 있던 세트가 침수될 뻔했다. 비가 많이 내려 세트장 인근 마을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호우경보가 발효됐고 아침부터 둑방에서 조금씩 물이 샌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세트가 어느 정도 완성된 상황이었다. 제작진은 혼비백산했다. 물이 세트장 쪽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기적처럼 비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장마로 습해진 세트장에선 나무로 만든 구조물이 휘고 곰팡이가 거대한 꽃처럼 피어올랐다. 곰팡이를 제거하고 망가진 세트를 복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세트뿐만 아니라 기구나 소품이 극 안에서 튀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신경 썼다. 미술팀은 촬영 전 우주전문가들을 만나 시나리오에서 표현하는 부분이 실제로 가능한지 수차례 자문했다. 마취총과 일반총이 혼용되는 시스템의 총기 디자인, 감압장치와 산소충전시스템, 월수저장고의 캡슐저장시스템 등 다양한 요소들이 시청자들의 눈에 어색해 보이지 않아야 했다.
지구가 배경일 땐 자원이 고갈된 미래의 암담한 분위기,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공포감을 만들어야 했다. 시나리오엔 식수가 모자라 등급별로 배급받는 것으로 설정돼 있었다. 주요 기관에서 이를 통제하고 관리할 테니 식수배급기는 공공기관 건물 옆에 있어야 한다고 봤다.
평가에 대한 부담은 당연했다. 이 감독은 “할리우드에선 1960~70년대부터 우주 배경의 영화를 활발히 만들어 왔다. 그런 수준 높은 SF물을 다수 접했을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키긴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며 “당연히 비교되겠지만 극의 세계관과 이야기에 미술을 자연스럽게 녹였다는 평가는 받아보자 싶었다”고 털어놨다.
이번 작업을 통해 느낀 건 뭘까. 이 감독은 “미술팀 모두에게 기억에 남는 작업일 거다. 끝나고 나면 모든 작업이 아쉽지만 이 작품은 특히 더 아쉬웠다”며 “각자 한계를 한 번씩은 경험했을 거다. 어렵지만 즐거운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어려운 공간의 디자인을 맡아도 결국 잘 풀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장착하게 된 작업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팀원들에게 우주 배경의 SF장르를 경험하게 했다는 게 선배로서 뿌듯하다”고 했다.
대학에서 공간디자인을 전공한 이 감독은 2003년 영화 ‘발레교습소’로 데뷔했다. 그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미술팀은 환경이 열악하고 대우도 못 받았지만 선배들은 밥 먹거나 쉴 때도 영화 이야기를 하고 화면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며 “카메라가 세상을 향한 마이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작품을 큰 스크린에서 봤을 땐 뿌듯함이 온몸을 휘감았다”고 전했다.
이 감독은 ‘화차’(2012년) ‘더 킹’(2016년) ‘허스토리’(2017년) ‘미쓰백’(2018년) ‘82년생 김지영’(2019년)등에 참여했다. 주로 캐릭터에 집중해 작품 속 공간을 만든다.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는 시나리오를 읽은 팀원들과 수다 속에서도, 오래된 사진집에서도, 예전에 갔던 전시의 도록에서도 얻는다.
‘고요의 바다’를 끝내고 나서 SF물에 또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 감독은 “만들어가는 재미도 있지만 방대한 세트 작업을 하면서 생긴 노하우를 더 발전시켜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며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마블시리즈 같은 히어로물도 작업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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