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규가 필사한 『곤여도설(坤輿圖說)』의 일부. [사진 허경진 교수]
“유럽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나라를 에스파냐라고 하는데, 둘레가 1만2500리이다. 세간에서 말하기를 세상 모든 나라 중 영토 크기에 대해, 하나로 이어진 것으로 따지자면 중국이 으뜸이나, 만약 다른 지역으로 분산된 영토까지 한다면 에스파냐가 으뜸이라고 한다.”
가톨릭 신부 페르비스트가 남회인(南懷仁)이라는 중국명으로 1672년에 간행한 『곤여도설(坤輿圖說)』 일부다. 세계 각지의 지리와 자연과학 정보를 집약한 지리과학서다. 출간 얼마 뒤 조선에 유입됐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고, 청-조선-일본 외에는 모두 오랑캐로 여기던 시절이다. 그런데도 『곤여도설』은 성호 이익의 제자를 중심으로 필사본이 만들어지는 등 큰 관심을 끌었다. 18세기 후반~19세기 활동한 학자 서유본은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 책을 언급하며 “중국은 적도의 북쪽에 치우쳐 있으니 진실로 천지의 중앙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윤동규가 필사한 『곤여도설(坤輿圖說)』의 일부. [사진 허경진 교수]
지난해 12월 나온 『곤여도설』은 성호의 제자인 소남 윤동규의 필사본을 번역한 것이다. 『곤여도설』은 현재 상권이 윤동규 종가에 필사본으로, 하권이 규장각에 목판본으로 한 권씩 남아있다. 윤동규는 이 필사본에 다양한 메모를 남긴 덕분에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이 책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바다의 조석(潮汐)을 다룬 부분에서 윤동규는 『직방외기(職方外紀)』를 인용해 “그리스에서 떨어진 에보니아 바다에는 조수가 하루 일곱 차례나 있다. 이름난 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연유를 알지 못해 애석하게도 이 물가에 이르러 죽고 말았다”고 메모했다. 『직방외기』도 명나라 말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니가 한문으로 펴낸 세계지리책이다.
윤동규는 영조 때 학자다. 당시 조선에서 이런 책이 필사되고 유통된 건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을 번역한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책과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세계 인식에 관해 들어봤다.
Q : 윤동규가 이 책을 필사한 이유는.
A : “성호의 부친이 사신으로 청나라 북경에 다녀오며 책 수 천권을 사 왔다고 한다. 그중 서학(천주교) 등 서양 관련 책도 많았다. 윤동규는 성호를 존경해 조금 더 가까워지려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사했을 정도(성호는 안산에 거주)였다. 그 집에서 책을 많이 필사했다. 남겨진 편지를 보면 천주교 관련 책도 많이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Q : 성호와 윤동규, 정약용 모두 남인이다. 이들은 왜 서학에 관심을 가졌나.
A : “남인은 당시 과거시험에서 소외됐다. 따라서 과거시험을 목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자유롭다 보니까 서양에 대해 탄력적으로 접근하고 관심 가질 수 있었다. 일본 유학자들이 서양 학문을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과거시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Q : 윤동규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닌데,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A : “본인 저서가 없다 보니 연구자 관심에서 소외된 사람이다. 성호나 안정복 같은 당대 유명 학자와 많이 교류했던 인물이다. 이분이 그들과 나눈 편지가 1300여편 남아있다. 성호박물관엔 정작 성호 편지가 없는데, 윤동규 종가엔 성호 편지가 200편이나 있다. 현재 이를 번역 중인데, 올해 말쯤 빛을 볼 것 같다. 편지는 그 사람 생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도구다. 번역이 완료되면 18세기 남인의 세계관과 철학이 더 상세히 알려지게 될 것이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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