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캔버스를 등지고 서서 양팔을 뻗어 움직이며 그린 ‘바디스케이프 76-2-2021’, 227x182㎝. [사진 PACE]
지난 14일 홍콩 페이스 갤러리에서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 이건용(80) 개인전이 개막했다. 대표 연작회화 ‘바디스케이프(Bodyscape)’ 신작부터 퍼포먼스 영상까지 작품세계를 폭넓게 소개하는 전시다. 이번 전시는 의미가 각별하다. 세계 미술시장에서 영향력이 큰 화랑 중 하나인 페이스가 한국 작가 중 이우환에 이어 이건용과 전속계약을 맺고 여는 첫 전시다. 페이스는 서울·뉴욕·런던·제네바 등 전 세계 9곳에 지점을 운영한다. 페이스는 “앞으로 미주와 유럽 지점에서도 이건용 화백 작품을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몇 년 새 국내외 미술계에서 위상이 크게 달라진 작가를 꼽는다면 단연 이건용이다. 지난해 9~10월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개인전에선 전시작이 완판됐다. 지금도 공식 관계를 맺고 있는 갤러리 현대와 리안 갤러리에는 구매 대기 중인 컬렉터가 수십 명이다. 올해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특별기획전에서 작품을 선보인다. ‘이건용 현상’이라 할 만하다.
‘76-2’ 연작 앞에 선 작가 이건용. 장시간 노출기법으로 촬영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건용은 1970년대부터 퍼포먼스·조각·설치·영상을 넘나든 한국 행위예술의 선구자다. 대표작 ‘바디스케이프’는 캔버스를 앞에 놓고 그린 게 아니다. 이른바 신체 드로잉, 즉 몸의 움직임을 기록한 퍼포먼스의 결과물이다. 만 80세가 되는 해에 세계 무대로 초대받은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Q : 페이스와 전속계약 했다.
A : “생애 처음 경험하는 일이니 어떻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들은 이건용의 ‘촌놈’ 기질 때문에 더 힘들었을 거다. 내가 뭘 몰라서 그런 건 아니고, 틀을 뛰어넘고 싶어서 ‘국내 갤러리 두 곳도 같이 가자’며 고집부리고 그랬다.”
Q : 국내 두 화랑과 함께한 게 2016년부터인데.
A : “군산에서 38년 살았다. 주목받지 못해도 내 예술 행위의 가치를 의심한 적이 없다. 사람들이 나를 모르는 것에 분노하거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것, 새로운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르는 건 당연했다. 네 살 꼬마 아들이 길바닥 돌멩이만 봐도 ‘작품’이라고 외칠 만큼 작업이 일상생활이었다.”
Q : 언젠가는 알아주리라 믿은 건가.
A : “확실하게 믿었다. 1973년 파리 비엔날레에 갈 때 비행기 표 살 돈이 없어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유럽에 입양되는 어린이 2명을 데려다주는 조건으로 가기도 했다. 그때에도 내 예술에 자신 있었다.”
캔버스를 옆에 두고 왼손과 오른손으로 반원씩 그린 ‘바디스케이프 76-3’. [사진 PACE]
파리 비엔날레 당시 이건용은 큰 나무 밑동과 흙을 전시장에 통째로 옮겨놓은 높이 2.5m의 설치 작품 ‘신체항’을 선보였다. 그가 경부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지나다가 뿌리째 뽑힌 나무를 발견하며 시작된 작품이다. 그는 ‘신체항’에 대해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품은 무엇인가 물은 작품이었다”고 설명했다.
이건용은 1967년 홍익대를 졸업한 뒤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ST(Space and Time)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75년 ‘다섯 걸음’(국립현대미술관), 79년 ‘이어진 삶’(상파울루 비엔날레) 퍼포먼스를 했다. 30여년 군산대 교수로 재직했다.
Q : ‘바디스케이프’가 가장 유명하다.
A : “눈으로 보지 않고 몸이 그린 것, 내 몸 움직임의 흔적이다. 내 키와 팔길이 등 신체의 제약이 자연스럽게 만나 이리저리 틀을 벗어나기도 하고 겹치기도 하며 작품이 된 거다.”
Q : 과정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76-3’ 연작은 ‘하트 그림’으로 통한다.
A : “작품을 통해 기존 미술과 다른 관점을 알리는 게 내 뜻이라면,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해나 해석은 오롯이 보는 사람 몫이다.”
Q : 작업에서 몸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왜 몸인가.
A : “죽으면 몸은 썩고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는 몸의 차원에서 산다. 예를 들어, 신이 그저 저 위에 존재하며 인간에게 메시지만 보냈다면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 같다. 인간 몸을 가지고 왔고, 몸을 십자가에 박히며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나. 몸을 가지고 예술을 만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Q : 어머니는 의사가 되길 원하며 쓸모있는 사람이 되라 했다고.
A : “어머니 말씀 때문에 예술의 쓸모가 평생 화두였다. 현대인은 모두 자기 방에 갇혀 있는데, 난 예술이 서로 교감할 수 있게 매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예술은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극단까지 밀고 가며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의사가 되지 않았지만, 그림을 팔아 최근 기독교단체에 5억원을 기부할 수 있었다. 후회 없다.”
Q : 앞으로 계획은.
A : “난 이제 여덟살일 뿐이고(웃음), 아직 실현하지 않은 아이디어가 많다. 더 과감하게 하고 싶었는데 ‘미친놈’ 소리 들을까 봐 풀어놓지 못한 게 꽤 있다. 슬슬 풀어놓으려 한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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