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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상전벽해..베네치아서 다양한 전시 펼쳐

부동산 분양정석 2022. 4. 29. 10:23

[노형석의 베네치아 아틀리에][노형석의 베네치아 아틀리에] ⑦
중견·원로들 비엔날레 참여
광주정신 조명한 특별전도
한국 미술시장 약진 더불어
작품 알리는 계기 자리잡아

베네치아 옛 명문가의 거처였던 퀘리니스탐팔리아 전시장에서 이사무 노구치와 2인전을 열고 있는 원로 작가 박서보씨의 작품. 베네치아 귀족의 흉상 옆에 자신의 작품 전시 이력을 빼곡히 적어 넣은 그림 뒷면이 그대로 노출돼 이채롭다.

지난 23일(현지시각) 개막한 59회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종합 미술전시회다. 1895년 세계 최초의 격년제 국제미술전으로 창설된 이래 2세기에 걸쳐 세계 미술의 흐름을 앞서서 짚고 이끌어온 장이었고, 최고 국가관과 작가를 뽑아 황금사자상을 주는 시상제도를 운영해 대가들의 등용문 구실도 해왔다.

하지만 한국 미술판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창설 90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에야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0~70년대 서구와 일본의 추상화풍에 영향을 받은 한국 보수 화단의 작가와 비평가들은 전위적인 베네치아 전시에 무지했고, 관심도 미흡했다. 제3세계 작가들을 다수 초청한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나 이상향으로 선망하던 프랑스 파리의 청년작가 비엔날레 등이 주된 출품 목표였다. 1986년 이일 평론가를 커미셔너로 하동철·고영훈 작가가 이탈리아관 귀퉁이에 첫 한국 전시를 차린 이래 2년마다 출품하면서 한국은 서구 미술의 동시대 흐름과 접속하게 된다. 뒤이어 1995년 거장 백남준의 주도로 상설 국가관까지 세우면서 한국은 세계 현대미술의 본류에 합류하게 됐다.

이런 과거에 비추어, 올해 베네치아에 펼쳐진 한국 미술인의 활동상은 가히 상전벽해라고 할 만하다. 국가관과 본전시 말고도 광주비엔날레 재단(대표 박양우)이 사상 최초로 광주항쟁의 정신을 미학적으로 조명한 베네치아 현지 특별전을 마련했다. 중견·원로 작가들은 널리 알려진 옛 귀족 명가의 궁전이나 거처에 세련된 볼거리를 연출한 전시판을 차렸다.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꽃 핀 쪽으로’는 베네치아 사람들이 묻힌 산 미켈레 묘지섬이 올려다보이는 도심 북단 스파지오 베를렌디스 전시장에 카데르 아티아, 홍성담 등 광주정신을 형상화한 국내외 작가 11명의 작품들을 담담히 펼쳐 놓았다.

베네치아의 주요 미술관인 팔라체토 티토에 차려진 원로 화가 하종현씨의 회고전 현장. 1970년대 하 작가의 기하학적 추상 작업들이 보인다.

단색조 회화의 대표 작가로 화폭에 사선을 죽죽 긋는 묘법 연작으로 알려진 박서보씨는 최고 명문 귀족가의 공간이었던 도심 미술관 퀘리니스탐팔리아에 일본계 미국인 거장 이사무 노구치의 화지 조명등 작품과 자신의 그림들이 어우러진 2인전을 차렸다. 극도로 정교한 디테일을 지닌 이탈리아 건축 거장 카를로 스카르파가 계단과 홀 등을 디자인한 내부 공간에서 당대 귀족들의 흉상과 초상화와 어우러진 작가의 그림들을 엿볼 수 있다. 영국 화랑 화이트큐브 주관으로 베트남 출신으로 최근 세계 미술계에서 스타 작가로 부상한 얌보가 기획을 맡았다. 단색조 회화의 대가로 꼽히는 하종현씨는 국제갤러리의 후원 아래 현지 유명 미술관인 팔라제토 티토의 초대를 받는 형식으로 회고전을 열었다. 한국 국가관 건립 이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기획자와 출품 작가를 번갈아 차지한 데 이어 회고전까지 여는 진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내부 갈등으로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던 중견 기획자 김선정씨가 뜻밖의 기획을 맡은 것도 화제다.

베네치아에서 신작전을 열고 있는 이매리 작가의 출품작 <제네시스>.

옛 족보 한지를 뜯어 각진 덩어리를 만들고 화면에 무수히 붙이는 작업을 해온 전광영 작가도 스펙터클한 전시장을 펼쳤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현지 콘타리니 귀족 가문의 저택에 이용우 기획자의 연출로 심장을 형상화한 설치물과 대작들을 내놓았고, 초빙한 이탈리아 건축가는 그의 작품 형식을 본떠 삼각탑 모양의 집까지 만들었다. 갤러리 현대는 후원해온 원로 작가 이건용씨의 몸 드로잉 근작들을 비엔날레 전시장 인근 목 좋은 특설전시장에 내걸었다. 광주와 서울, 외국을 오가며 활동해온 작가 이매리씨는 명소 리알토 다리 인근의 산폴로 갤러리에서 성경 창세기와 금강경 구절 등을 검은 화폭 위에 금물로 써내려간 작품들을 선보이는 ‘제네시스’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다. 빌모트재단 전시장에서 배병우 작가가 연 근작 사진전도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베네치아의 한국 전시들 상당수가 광주와 연관된다. 광주비엔날레의 전현직 대표이사(이용우, 김선정, 박양우)들이 기획에 참여했고, 광주특별전은 하종현전을 만든 김선정씨가 대표 시절 추진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최근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한국 미술시장의 약진과 결부돼 시장에서 각광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알리고 인맥을 쌓는 계기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한국 미술을 알리고 세계 미술의 자양분을 흡수하던 자리를 넘어 시장 작가들의 현지 전시회는 관행처럼 굳어질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이탈리아 건축 거장 카를로 스카르파가 디자인한 작품으로도 유명한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올리베티 매장 바닥에 조각가 앤터니 곰리의 인체상이 놓여 있다.

국외 거장들의 전시도 빼놓을 수 없다. 시내 아카데미아미술관과 도심 옛 궁전에 압도적인 스케일과 충격적인 내용의 작품들을 선보인 인도 출신 작가 아니쉬 카푸어가 첫손에 꼽힌다. 건물 내부를 피투성이 살점 덩어리 같은 검붉은 물감 덩어리로 채우거나 끝간 데 없이 깊고 오묘한 빛깔로 오목하거나 볼록한 조형물 단면을 마치 평면처럼 보이게 만든 그의 신구작들은 개막 직후부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베네치아의 얼굴인 도심 두칼레궁에 스펙터클한 대형 평면 작업을 들고 나온 안젤름 키퍼와 건축 거장 스카르파가 디자인한 작품으로도 유명한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올리베티 매장에 폰타나의 드로잉과 함께 등장한 조각가 안토니 곰리의 인체상 전시도 주목된다.

산마르코 광장과 바다를 두고 마주 보는 산조르조마조레섬 전시장에 차려진 기획전 ‘파이어’의 전시 광경. 프랑스 거장 이브 클랭이 화염분사기로 화폭을 불태우고 지져서 그린 대작들이 내걸려 있다.

이밖에 산마르코 광장과 마주보는 산 조르주 마조레섬 전시장에 차려진 이브 클라인 등 거장들의 불태우기 작업들을 선보이는 기획전 ‘파이어’와 푼타델라도가나에 대형 전시를 차린 개념미술가 브루스 나우먼의 개인전, 독일의 전설적 거장 요제프 보이스의 팔라초 치니 전시 등도 애호가들의 순례 코스가 되고 있다.

베네치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