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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사찰 화계사] 북한산이 숨고르는 자리.. 聖俗이 따로 있으랴

부동산 분양정석 2021. 12. 13. 10:48

화계사 전경. 뒤쪽으로 북한산 자락.

북한산은 32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적인 명산이다. 전 세계 대도시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산을 품고 있는 곳은 서울이 유일하다. 그래서 서울은 복많은 땅이다. 북한산은 특히 동북쪽 산세가 웅장하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국망봉) 세 봉우리가 기세 좋게 뻗어 있어 삼각산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다. 백운대에서 만경대와 동장대로 남하한 삼각산 주능선이 동남쪽으로 흘러내린 끝자락에 도심 속 명찰 화계사가 자리잡고 있다. 굳세던 산의 기세가 화계사에 이르러 숨을 고르면서 계곡과 울창한 숲을 나투었다. 화계사 뒤편으로 멀리 보이는 북한산이 마치 절을 지키는 사천왕 같다. 이 절은 주택가 가까이에 있지만 숲에 감싸여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빨래골. 조선시대 궁궐 무수리들은 이곳에서 빨래를 한 후 화계사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다.

무수리들 애환 서린 빨래골

지난 2010년 개통된 북한산둘레길은 12개 구간 44km(도봉산 구간을 합하면 70km). 이 중에서 화계사를 지나는 구간을 흰구름길(북한산둘레길 3구간)이라 부른다. 이준열사묘역 입구에서 산과 세속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북한산생태숲(성북생태체험관)에 이르는 4.1km 산길이다. 흰구름길은 북쪽으로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 서남쪽으로 솔샘길(둘레길 4구간)로 이어지는데 경사가 심하지 않아서 마실 삼아 걸어도 1시간 20분 정도면 완주할 수 있다. 이 구간에는 화계사를 비롯해 본원정사와 삼성암 등 오랜 사찰과 냉골·빨래골 등의 계곡, 조병옥박사묘 등 명소가 적지 않다.

화계사 대웅전.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양옆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빨래골은 북한산 동쪽 자락에 묻힌 조그만 골짜기다. 자그마한 시냇가 같은 모습으로 유별난 구석은 없지만 이름에 얽힌 사연이 재미있다. 북한산 동쪽 밑에 자리한 수유동은 계곡 물이 많아 예전에 무너미라 불렸다. 무너미란 저수지 물이 고이는 것을 막으려고 한쪽 둑을 조금 낮추어 물이 넘치면 자연히 흐르게끔 만든 것으로 물이 풍부하다 보니 일찌감치 마을이 생겨났다.

궁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여인들을 무수리라 불렀다. 그들은 임금 내외와 왕족,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과 상궁, 궁녀, 군사의 옷을 개천이나 인근 산골에서 빨았는데 궁궐 근무자들이 많다 보니 하루에 나오는 세탁물이 어마어마했다. 빨래 중에는 특별히 다뤄야 되는 빨랫감도 많아 일반인들이 이용하던 청계천에서 처리가 어려워 이곳에서 했기 때문에 빨래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가장 가까운 궁궐인 창경궁까지 7km. 무수리들은 무거운 빨랫감을 짊어지고 동소문을 나와 미아리고개를 넘어 이곳까지 올라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들을 위한 휴식시설도 있었다고 하며 환궁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인근 화계사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구름전망대는 빨래골에서 400m 거리에 있는 전망대다. 타원형 계단으로 만들어진 이 전망대는 12m 정도로 높지 않지만 북한산 동쪽 일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빼어나다.

화계사 대웅전 전경. 1870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중수됐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65호.

조선 왕실이 아낀 ‘궁절’

화계사華溪寺는 ‘꽃과 시냇물과 절, 세 가지가 아름다운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근 부허동浮虛洞의 보덕암普德庵을 1522년(중종 17년)에 신월 선사가 화계동으로 옮겨 화계사라 개명했다. 1618년 광해군 때 큰 불로 몽땅 타버렸지만 이듬해 중창됐고 고종 때 중수했다. 당시 궁중 최고 어른인 조 대비(헌종의 어머니)가 시주를 했고 상궁들 출입이 잦아 사람들은 화계사를 ‘궁宮절’이라 불렀다.

화계사 동종. 숙종 9년(1683년)에 주조됐다. 원래 영주 희방사에 있던 것을 1898년 화계사로 옮겼다.

화계사는 특히 해외에 한국불교를 알리는데 힘써 왔다. 특히 숭산 큰스님이 조실로 주석하고 있을 때 국내외 많은 불자들이 찾아왔다. 화계사가 외국인 승려의 성지가 된 것은 숭산스님의 오랜 해외 포교활동 덕분이다. 숭산 큰스님은 해외에 한국 선불교를 널리 알리겠다는 뜻을 안고 197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포교활동에 매진했다. 그가 해외에 머무는 동안 5만명이 넘는 서양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버드대학생이던 현각스님도 숭산의 가르침에 감화돼 화계사에서 출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현각스님은 이를 <만행>이라는 책에서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숭산이 해외에 세운 선원은 동유럽까지 뻗어나가 30개 나라에 120곳이 넘으며 미국에 세운 프로비던스 선원에는 1982년 전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평화회의를 열기도 했다. 숭산 스님은 1984년 화계사에 국제선원을 열어 외국인 스님들이 정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2004년 입적했다. 화계사는 숭산 스님 뜻을 이어 2018년에 국제선문화체험관을 열었다.

미륵석불전

해외포교 선구 숭산스님의 자취

화계사에는 문화재도 적지 않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팔작지붕으로 지금의 건물은 19세기 후반 조선왕실의 도움으로 중수됐다. 이때 시주를 흥선대원군이 했다. 최고 권력자 대원군이 관여했기에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화계사대웅보전중건기문’에는 석수 30명, 목공 100명이 달려들어 수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현판은 근세 명필 정학교가 썼다.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은 1877년 황해도 배천군에 있는 강서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다시 금을 입히기 위해 지장보살상의 복장을 열었더니 ‘1649년 (인조 27년) 강서사에서 제작’했다는 발원문이 나왔다. 1897년 큰 종을 영주 희방사에서 가져왔다. 왕실과의 끈이 두터운 화계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본 기사는 월간산 12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