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코로나19로 지난해 공연을 쉬고 2년 만에 열린다. 유니버설 발레단 측은 “공연장 3층 객석을 추가 판매했을 정도로 관객 관심이 뜨겁다”고 전했다. [사진 유니버설 발레단]
화려한 트리 앞 크리스마스 파티. 어른과 아이가 어울리는 즐거운 시간이다. 이때 선물을 들고 아저씨가 등장한다. 주인공 소녀는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로 받고 잠드는데, 한밤중 인형과 생쥐 왕의 싸움에서 인형을 도와준다. 인형은 왕자로 변하고, 둘은 달콤한 과자의 나라로 환상적인 여행을 떠나 사랑하게 된다.
매년 12월이면 무대에 오르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줄거리다. 단순하고 환상적이며 행복하다. 어른과 아이 관객을 모두 모아 전 세계 발레단의 흥행을 보장하는 효자 작품이다. 하지만 ‘호두까기 인형’만큼 복잡하게 변화한 발레 작품도 드물다. 신혜조 중앙대 외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는 “‘호두까기 인형’의 미국 공연 버전만 150여종”이라며 “이 작품의 변화 양상은 현대문화 연구의 주요한 주제”라 소개했다. 우리가 보는 ‘호두까기 인형’은 그 변화의 어디쯤 있는 무대다.
코로나19로 지난해엔 없었던 ‘호두까기 인형’이 돌아온다. 한국의 양대 발레단인 국립발레단, 유니버설 발레단이 각각 준비 중이다. 국립발레단은 1977년, 유니버설 발레단은 86년 이 작품을 처음 전막 공연했다. E.T.A.호프만의 동화가 원작인 ‘호두까기 인형’은 차이콥스키 음악에 마리우스 프티파의 안무로 1892년 러시아에서 초연했다. 국립발레단은 일본 안무가 아리마 고로 버전으로 시작해 96년부터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버전(1934년), 그리고 2000년부터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버전(1966년)을 공연하고 있다. 유니버설 발레단은 193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버전을 바탕으로 각색해 공연한다.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코로나19로 지난해 공연을 쉬고 2년 만에 열린다. [사진 국립발레단]
주인공 이름부터 다르다. 국립발레단에선 ‘마리’, 유니버설 발레단에선 ‘클라라’다. 이름의 변천도 역사 흐름 위에 있다. 원작인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대왕’ 주인공 이름은 독일식인 ‘마르헨’이었다. 이를 프랑스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가 번역하며 ‘마리’로 바꿨다. 이를 발레 작품으로 처음 만든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는 ‘클라라’를 선택했는데, 소설 속에선 마리의 인형 이름이었다.
무용수 연령도 발레단 마다 다르다.
‘호두까기 인형’의 변천사엔 미묘한 선택도 있었다. 클라라 혹은 마리의 가정 형편을 ‘얼마나 부유하게’ 표현할지의 문제다. 러시아 초연은 황실 발레에서 시작해 화려한 가정을 묘사했다. 고위 관료 집안의 크리스마스 파티는 우아하고 귀족적이었다.
1954년 미국 뉴욕 시티 발레단의 조지 발란신 버전은 ‘중산층’ 집안 부모, 아이들의 사랑 표현이 눈에 띈다. 노영재 무용평론가는 한 논문에서 “냉전시대 미국에서 가족 일상의 소중함이 중시됐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92년 영국 안무가 매튜 본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배경을 고아원으로 잡았다. 원생들이 함께 스케이트를 탄다.
최근 ‘호두까기 인형’의 세계적 관심사는 ‘정치적 올바름’이다. 2019년 뉴욕시티발레단은 주인공 마리에 흑인 발레리나를, 왕자 역에 중국계 발레리노를 캐스팅했다. 하와이 발레단은 훌라춤을 추고, 남미 발레단에서는 고유의 놀이인 피타냐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2막 스페인의 초콜릿, 아라비안의 커피, 중국의 차를 묘사하는 장면은 유명한 볼거리였지만 여기에 깃든 인종 편견이 문제로 불거졌다. 중국 전통복장을 본뜬 차림의 무용수가 곡예동작을 하는 장면 등이 서구 중심적 시각으로 그려졌다는 지적이다. 베를린 국립발레단은 이 때문에 올해 공연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정호 무용 칼럼니스트는 “미국 퍼시픽 노스웨스트 발레단은 ‘중국인의 춤’ 대신 슈퍼 히어로 귀뚜라미를 기용하고, 털사 발레단에선 중국식 무술이 등장했다”며 “특히 아시아계 인구가 늘어나는 미국을 중심으로 이국적 춤에 대한 자성 움직임이 있다”고 했다.
다만 한국의 ‘호두까기 인형’에는 이런 조류가 반영되지 않는다. 한정호 칼럼니스트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인종 논쟁은 한국도 필연적으로 겪을 일”이라며 “한국 무대에 오를 작품에 민족성에 대한 관념과 예술 작품 관계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인주 무용 평론가도 “한국의 두 무대는 조금씩 다르지만 러시아 고전 버전이란 점에서 관객이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며 “이 작품이 공인된 블루 오션인 만큼 원작 무대와 더불어 새로운 버전도 보여주는 시도를 기대한다”고 했다.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은 21~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유니버설 발레단은 18~3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각각 공연한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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