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주문진항 어판장 바닥에 곰치가 널려 있다. 작년 한때 1마리당 20만원까지 가격이 치솟았으나, 올겨울 어획량이 늘면서 가격이 많이 내려갔다. 검정 빛을 띠는 것이 수컷, 붉은 빛을 띠는 것이 암컷이다.
사실 우리네 동해안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 제철이다. 온갖 해산물이 올라오는 계절이어서다. 겨울 포구는 일찍 잠에서 깬다. 동해안 최대 어시장으로 통하는 강원도 강릉 주문진항도 그렇다. 새벽 조업을 마친 고깃배들이 오전 6시면 하나둘 항구로 돌아와 곰치며, 대구며, 도루묵이며 온갖 제철 생선을 부려놓는다. 덩달아 주변 시장과 먹자골목도 활기를 띤다. 겨울 포구 여행이 좋은 건 생생한 삶의 현장을 엿보는 일이자, 배불리 배를 채우는 일이어서다. 강릉으로 맛 기행을 다녀왔다. 날이 찼지만, 뱃속은 내내 따듯하고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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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주가의 아침상
못난이 생선으로 유명한 곰치(미거지). 겨울철 동해안에서만 나는 귀한 어종이다.
곰치(물곰으로도 불린다. 정식 명칭은 ‘미거지’)가 풍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강릉에 갈 이유가 충분하다. 몇 년 새 어획량이 확 줄어 제철이 무색했지만, 올겨울은 다르다. 강릉수협에 따르면 하루 4000톤가량을 거둬들이고 있다.
10일 주문진항에서 본 것도 어판장 바닥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 곰치였다. 홍정현(47) 중매인은 “지난겨울엔 1마리당 20만원까지 가격이 올랐지만, 요샌 1~2만 원대에서 거래된다”고 귀띔했다(서남해안에서 두루 잡히는 물메기(꼼치)와 생김새도 이름도 닮았지만, 엄연히 다른 어종이다). 험상궂은 생김새 때문에 꺼리기도 하지만, 술꾼치고 곰치 마다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겨울철 동해안 최고의 해장 음식으로 통하는 것이 곰치국(물곰탕)이다.
곰치국(물곰탕)은 동해안의 애주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해장음식이다. 묵은지를 넣어 얼큰하게 끓이기도 하고, 담백한 맛을 살려 말갛게 끓여 먹기도 한다.
주문진 포구에 아침부터 손님을 받는 곰치국집이 사방으로 널려 있었다. 묵은지를 넣어 얼큰하게 끓이는 게 보통이지만, 15년 내력 ‘삼미식당’에서 맛본 곰치국(1만5000원)은 국물이 맑았다. “김치 맛이 강하면 곰치 맛이 가린다”는 게 양명학(60) 사장의 지론이었다. 멸치육수를 곁들인 말간 곰치국은 개운하고도 시원했다. 물컹한 살은 씹을 것도 없이 술술 넘어갔다. 속풀이를 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옆 테이블에서 연신 ‘캬’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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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복도 살찌는 계절
밀복은 비교적 독성이 약하고, 살이 많아 횟감으로도 탕감으로도 인기가 높다.
복어도 찬바람이 불 때 더 맛있다. 12월부터 2월까지가 제철인데, 독성은 줄고 살은 더 단단히 차오른다. 회는 두말할 것 없고, 복국(복지리)은 해장용으로도 위력이 어마하다.
복어잡이는 동해안에서도 알아주는 중노동이다. 주문진항‧강릉항 등에서 출항한 고깃배는 울릉도 앞바다까지 꼬박 10시간을 달려가 조업에 나선다. 만선이 되거나, 식량과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돌아오는 법이 없다. 한번 나가면 대개 5일씩 바다 위에서 복어와 사투를 벌인다. 한 배에 많게는 7톤 가까운 복어가 실려 뭍으로 돌아온단다. 주로 밀복이 많다.
강릉항 인근 '이젠 씨푸드'의 복어회 상차림.
강릉항 인근 활어회 전문점 ‘이젠 씨푸드’의 수조에 마침 자연산 밀복이 수두룩했다. 잔뜩 배를 부풀리며 성을 내던 밀복은 전문가에 손에서 이내 뽀얀 속살을 드러냈다. 복어회는 속이 비칠 정도로 얇게 포를 뜨는 게 정석인 줄 알았는데, 제법 두툼한 밀복회(8만원)가 깔렸다. 김남태(48) 사장은 “양이 많아 보이려면 얇게 저며야 하지만, 밀복의 식감을 느끼려면 적당한 두께 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나리와 곁들여 먹는 복어회는 쫄깃하면서 달았다. 내장과 뼈다귀를 가득 넣어 끓인 복국 역시 진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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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유혹
해풍에 건조 중인 양미리. 강릉 사천항이나 주문진항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 계절 동해안의 생선장에서 발에 채도록 보게 되는 것이 도루묵과 양미리(까나리)다. 시장 밖 골목에서도 두 생선을 그물에 펼쳐 놓고 말리는 모습을 부지기수로 보게 된다. 반건조 도루묵과 양미리로 요리한 생선 조림이 식당마다 반찬으로 깔린다.
곰치와 밀복이 귀족이라면 도루묵과 양미리는 서민이다. 둘 다 어른 손바닥 크기도 못 되는 자잘한 생선이지만, 산란을 앞둔 이맘때는 알을 가득 품어 제법 진한 맛을 낸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도 좋다. ‘도루묵 20마리 1만5000원’ ‘양미리 30마리 1만원’ 좌판에 내걸린 가격은 이렇지만, 덤으로 서너 마리씩 끼워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판장이 끝나가는 시간 주문진항 풍물시장은 손님 맞을 채비로 분주했다. 시장 안 먹자골목 전체가 도루묵과 양미리 굽는 냄새로 진동했다. 유혹을 참을 재간이 없었다. 몸집이 작고 가느다란 양미리는 뼈째, 알이 꽉 찬 도루묵은 톡톡 터지는 식감 느끼며 꼭꼭 씹어 먹었다. 씹을수록 입 안 가득 고소함이 퍼졌다.
알이 꽉찬 도루묵 구이와 양미리 구이. 양미리는 머리만 떼고 통째로 씹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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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마을 클라쓰
골뱅이 에스까르고, 홍가자미 버터구이. 청어 타파스, 안목해변 '미트 컬쳐'가 내놓는 제철 생선요리들이다. 셋 다 와인가 잘 어울린다.
포구에 붙어사는 갯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세공하는 일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값싸고 싱싱한 해산물이 짝 깔린 식당 틈에서, 값비싼 요리를 내는 레스토랑이 살아남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해안 최대의 번화가로 통하는 강릉항 안목해변. 근래 카페거리가 뜨면서 주변으로 근사한 레스토랑이 하나둘 문을 열고 있다. 카페거리 뒷골목의 ‘미트 컬쳐’처럼 예약 손님이 줄을 잇는 맛집도 생겼다. 스웨덴 유학파로 파크하얏트 서울, 반얀트리 호텔 등을 거친 최종원(39) 셰프가 이태 전 문을 연 가게다. 대표 메뉴는 스테이크지만, ‘오늘의 생선 요리(3만7000~4만원)’를 찾는 사람이 더 많다. 최 셰프가 그날그날 어시장에서 사들인 싱싱한 해산물로 요리를 만든다. 이를테면 제철 곰치와 청어를 활용한 스튜와 타파스 등이다.
이날 식탁에는 홍가자미를 활용한 프랑스 가정식 ‘솔 뫼니에르(가자미 버터구이)’가 올랐다. 홍가자미는 동해안에서는 차례상에나 올리던 귀한 생선이다. 겨울바다가 키운 홍가자미는 유독 향이 깊고 담백했다. 그러고 보니 포구 앞에서 칼질을 한 것도, 와인을 곁들인 것도 처음이었다.
강릉 주문진항의 아침. 잡아올린 해산물을 부려놓는 고깃배와 상인들로 분주한 모습이다.
강릉=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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