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인 신채호 선생은 이런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선생은 1936년 2월 21일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중 순국했습니다.
1880년 11월 충남 대덕군(오늘날 대전시 중구)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성균관에 들어가 박사가 됐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에 나갈 뜻을 버리고 낙향했습니다.
이후 황성신문에 논설을 써다가 1906년에는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며 국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논문을 발표해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습니다.
항일결사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가하며 관련한 글을 다수 발표했습니다. 순한글 계몽성 월간 '가정잡지'도 발행했습니다. 그는 친일조직인 일진회 성토에도 앞장섰습니다.
1910년 4월 중국 칭다오로 망명, 안창호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한 뒤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조직된 항일단체 기관지인 권업신문 주필로 활동하다가 1914년 신문이 강제폐간되자 만주와 백두산 일대, 고구려 및 발해유적지 등 한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기도 했습니다.
다음해인 1915년에는 상하이로 가서는 박달학원을 설립, 민족교육에 힘썼습니다. 이어 베이징으로 건너가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을 창단해 단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19년 상하이에서 진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임시정부 공직을 사퇴했습니다.
그는 당시 임시정부는 소수 의견만으로 소집돼 불완전한 상태고 항일운동을 전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주장했기 때문에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부적절한 인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선생은 1923년 상하이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며 임정을 해체하고 새 조직을 만들자는 창조파의 주동역할을 했습니다.이어 안창호 등 임정 개조파와 임정 존폐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렬됐습니다.
이후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관련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자금을 조달하러 대만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하다가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선생은 이런 견해를 역사연구에도 반영해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등이 있습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유창엽 기자 김지효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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